▲ 드라마 <파스타> |
직업적 특성으로 인해 일상생활에서도 본의 아니게 깐깐해지는 경우가 있다. 긴장을 풀고 대충 넘어가도 되는 순간에도 업무 때처럼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제조업체 품질관리사인 K 씨(여·34)는 단골 옷집을 갈 때마다 옷가게 사장의 따가운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일반 고객들보다 몇 배나 더 꼼꼼하게 옷의 품질을 살피기 때문이다.
“보통은 옷의 디자인에 치중하고 제품 하자도 크게 눈에 띄는 게 아니면 그냥 넘어가잖아요. 전 눈에 보이는 게 많은 편이라 사장한테 이것저것 불만을 제기하니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옷의 안감 박음질부터 원단 상태까지 살피거든요. 옷이나 운동화는 물론이고 일반 전자제품을 살 때도 마찬가지예요. 뭐 이런 걸 갖고 그러느냐고 타박하는 점원들도 있고 친구나 가족들도 너무 까다롭게 군다고 하는데 눈에 자꾸 그런 흠들이 보여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무역회사에서 경리 업무를 담당하는 C 씨(여·28)는 숫자에 민감하다. 아무래도 매일매일 계산하는 게 직업인 만큼 평소에도 버릇이 나온다.
“친구들 만나서 뭐라도 먹으러 가면 바로 얼마씩 내는지 계산해요. 전자계산기 두드리는 것처럼 손가락을 자꾸 움직이게 되고요. 마트 같은 곳에서 영수증을 받으면 다시 다 계산해 봅니다. 실제로 몇 번 잘못 계산된 걸 발견한 적도 있어요. 또 하나 직업적 습관이 있다면 차를 타고 갈 때 앞에 번호판이 있으면 자꾸 숫자를 더하는 거예요. 잊고 딴 생각을 하려고 해도 눈에 보이면 자동으로 손가락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거죠. 전화번호도 보이면 빼거나 더하게 되고요. 숫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네요.”
업무를 할 때처럼 직업적인 시선으로 매사를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디를 가든 눈에 보이는 것만 보인다. 외식업체에 근무하는 H 씨(32)는 여자친구를 만날 때마다 미안해진다. 데이트에 집중하면서 일상 얘기를 해야 할 텐데 자꾸 일 얘기만 나온단다.
“밥 먹으러 가거나 커피를 마시러 가면 여자친구가 짜증낼 때가 많습니다. 평범한 대화를 해야 하는데 자꾸 업장 분석을 하거나 음식 평가를 하거든요. 이거 한 잔에 얼마이니 원가는 얼마고, 마진은 얼마겠다부터 회전율에다 상권 임대료까지 예상치를 뽑으려고 하거든요. 상대방 이야기에 집중 못하고 자꾸 테이블 회전율만 관찰하고 있는 겁니다. 안 그러려고 하는데 버릇처럼 나와요. 음식점에선 좀 더해요. 요리 쪽이 전공인데다 현재 하는 일이 레시피 연구이기도 해서 음식이 나오면 반찬부터 메인요리까지 다 뒤적거리거든요. 상대방이 먹기도 전에 젓가락으로 다 뒤집어 놓고 어떻게 만들었네 하면서 평을 하니까 입맛이 떨어지죠. 좀 신기하거나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궁금해서 못 참겠어요.”
성형외과에서 일하다 중소기업으로 이직한 S 씨(여·28)는 업종 자체를 바꿨지만 이전 직업의 흔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고 이야기한다. 직업병처럼 상대방을 대할 때 자꾸 병원에서 일할 때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회사에서나 밖에서 이야기할 때 얼굴을 보잖아요. 자꾸 속으로 견적을 내고 있어요. 코를 좀 하면 훨씬 낫겠다, 치아교정까지 하면 대충 비용이 얼마 들겠네 하면서요. 특히 여자들과 이야기할 때는 어디를 어떻게 손봤는지 눈에 훤히 보이니까 자꾸 그 부위만 쳐다보게 되더라고요. 보통 사람은 모르게 살짝 고쳤어도 저한테는 다 보이거든요. 그럼 상대방도 느끼는 게 있어서 좀 불편해 하죠. 병원 시절의 말버릇도 여전히 남아있어요. 회사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나 업무상 고객들의 전화를 받을 때 저도 모르게 ‘환자분’이라는 호칭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럴 때 제 이전 직업을 모르는 분들은 굉장히 당황하시죠.”
직업 때문에 일상이 피곤해지는 경우도 있다. 항상 직업적인 특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 계열에 종사하는 J 씨(32)는 한글 맞춤법에 유난히 민감하다. 일할 때 항상 주의 깊게 보던 버릇도 있지만 신입 시절 선배의 불호령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당시 아무 생각 없이 직장 선배에게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냈는데 다음날 엄청 혼났습니다. 우리말을 다루는 사람이 이렇게 엉망으로 쓸 수가 있느냐면서요. 보통 문자는 편하게 쓰잖아요. 그 다음부터는 정신이 바짝 들어서 문자 하나를 보낼 때도 맞춤법, 띄어쓰기를 다 완벽하게 해서 보냅니다. 길 가다 간판들도 한 번씩 꼭 읽어보고 틀린 건 교정하고요, 특히 신문이나 책을 볼 때는 펜으로 교정부호를 적어 넣기도 해요. TV를 볼 때도 전체적인 내용은 잘 안 들어오고 틀린 단어나 문장만 보입니다. 저도 이젠 어쩔 수가 없네요.”
포장 디자이너로 일하는 L 씨(29)도 일종의 직업병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면 늘 타박을 듣는다. 물건을 사러 가거나 음식을 먹을 때 매장 분위기나 인테리어를 보고 비판부터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친구들도 그러려니 한다고.
“제가 괜찮다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비판만 잔뜩 늘어놓는데 처음에는 친구들이 듣기 싫어하더니 이제는 아예 잘 듣지를 않아요. 그래도 전 쉴 새 없이 관찰하고 평을 하죠. 특히 업무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디자인 샘플에 유난히 민감해요. 하루는 괜찮은 포장 상자가 있어서 다른 사람 시선도 생각하지 않고 매장 쓰레기통을 뒤졌거든요. 같이 갔던 친구들이 창피하다고 말렸는데 전 그런 걸 꼭 손에 넣어야 마음이 편해요. 어머니가 제 방을 보시면 항상 쓰레기장 같다고 말씀하세요. 밖에 나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주워오는 포장지, 패키지 상자들이 가득하니까요.”
지난해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녀 직장인 894명 중 90% 이상이 직업병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스트레스로 인한 직업병이 많았는데 직업적인 습관으로 인한 행동이나 의식의 변화도 일종의 직업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신체적인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직업 정신이 발휘된다는 것이 어느 정도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제 의식적으로라도 퇴근 후에는 직업의 흔적을 버려보는 건 어떨까. 이런 다짐조차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