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0년 출간된 <선각자 정인욱> 속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 가족의 모습. 뒷줄 좌로부터 둘째 사위 박성빈, 차녀 정지윤, 맏사위 정의선, 장녀 정지선, 장남 정대현, 앞줄 좌로부터 정도원 회장, 부인 이미숙씨. |
일반인들에게 ‘삼표’라는 이름은 굉장히 생소하다. 재계 순위로나 유명세로 봐도 삼성 현대 LG 등 내로라하는 대재벌과 어깨를 견주기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인 데다 대중을 상대로 소비재를 파는 회사도 아니어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과거 ‘삼표연탄’을 떠올린다면 대부분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일 만한 회사다.
지금의 삼표그룹은 정도원 회장의 아버지이자 황해도 재령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 고 정인욱 창업주가 1966년 삼강운수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골재, 레미콘, 철도사업 등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강원산업으로 발전, 덩치를 키워나갔다.
특히 삼표그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강원산업은 외환위기 이전까지 국내 레미콘사업 분야에서 오랫동안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쌍용양회공업(당시 대한양회)이 독점, 주도했던 초창기 국내 레미콘사업에서 삼표는 콘크리트기술연구소 등을 설립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또 1988년 연탄사업부문을 독립시키기 전까지 삼표연탄은 삼천리연탄과 함께 국내 연탄시장을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지금 삼표를 아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일반 가정에서 연탄 소비를 거의 하지 않게 되면서 삼표라는 이름은 기억에서 차차 지워져가고 있다. 현재 삼표가 영위하는 사업은 골재, 콘크리트, 철도, 건설폐기물 처리 등 대부분 소비자와는 거리가 멀다. 삼표그룹의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가 ‘삼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인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삼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만들어간 것은 또 있다. 바로 ‘혼맥’이다. 삼표그룹 정씨 일가의 결혼이 화제가 된 것은 정문원 전 강원산업 회장의 자녀들 때부터다. 고 정인욱 회장의 자녀들 중엔 재벌가와 혼인한 이가 없다. 단지 백병원의 백낙훤 인제재단 이사가 그나마 눈에 띄는 인물이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한 다리 건넌다면 재벌가와 관계가 있기는 하다. 정문원 전 회장의 부인 최금자 씨가 고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의 부인 최금숙 씨의 동생이다. 정 전 회장과 박 전 회장은 동서지간인 것이다. 박용오 전 회장은 두산그룹의 ‘형제의 난’으로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지난 2009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삼표그룹은 창업 3세에 들어서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혼인으로 인연을 맺는다. 우선 정문원 전 회장의 장남 대호 씨는 허남각 삼양통상 회장의 장녀 정윤 씨와 결혼했다. 삼양통상은 핸드백 신발 제조용 피혁을 만드는 기업이다. 이 회사의 허남각 회장은 허창수 GS그룹 회장과 사촌지간이다. 즉 이들의 할아버지가 진주 만석꾼이자 LG그룹 창업 당시 자본을 댄 허만정 씨인 것이다. 허남각 회장이 비록 ‘수’자 항렬을 쓰지는 않았지만 동생들로는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이 있다.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 자녀들의 혼인관계는 더욱 화려하다. 정도원 회장은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장녀 지선 씨(38), 차녀 지윤 씨(35), 외아들 대현 씨가 그들이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과 성과 이름이 같은 장녀 지선 씨의 남편은 공교롭게도 현대차그룹 정의선 부회장이다. 결혼 당시 부부가 서로 이름이 비슷하다는 것도 화젯거리가 됐다. 지선 씨는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스물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정 부회장과 결혼했다. 정 부회장과 지선 씨는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고 한다. 정몽구 회장과 정도원 회장도 경복고 선후배 사이로 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정의선 부회장과 지선 씨의 사촌오빠가 중·고등학교 동창이다. 즉 집안끼리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것이다.
차녀 지윤 씨는 IT회사 사운드파이프코리아 박성빈 대표와 결혼했다. 박 대표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아들이다. 따라서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과 박성빈 대표는 동서지간이 된다.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국내 철강산업의 경쟁구도를 생각할 때 정 부회장과 박 대표가 동서지간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정도원 회장의 입장에서 보면 정몽구 회장과 박태준 회장이 모두 사돈이다.
그리고 이번에 아들 대현 씨가 구자명 LS니꼬동제련 회장의 장녀 윤희 씨와 결혼하게 됐다. 구자명 회장은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삼남이다. 구자홍 LS그룹 회장, 구자엽 LS전선 회장이 형이며 구자철 한성 회장이 동생이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과는 사촌지간이며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숙부가 되는 셈이다.
이처럼 삼표그룹의 혼맥은 두산 현대차 포스코 GS LS 등과 얽히고 설켜 있다. 재계에서 그다지 두드러진 기업이 아님에도 어떻게 내로라하는 기업과 사돈을 맺을 수 있는 것일까. 알려지기로는 당사자들이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이’다. 하지만 재계에서도 이른바 ‘서로 격이 맞아야’ 혼인이 성사되는 경우가 많다. 삼표그룹은 현재 매출이 1조 5000억 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삼표그룹의 위상은 대단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현재 삼표그룹과 경쟁하고 있는 한 대기업 인사는 “예전 강원산업은 국가 에너지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재벌이었다. 지금의 SK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라며 “그때 인연이 많이 작용했을 듯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겪고 에너지산업의 변화가 극심해지면서 정문원 전 회장의 강원산업은 무너졌고 지금의 정도원 회장의 삼표그룹이 그 뒤를 이었다.
삼표그룹은 이런 화려한 혼맥과 인연의 덕을 본 듯하다는 게 재계 일각의 관측이다. 외환위기 때 무너져 기업재무구조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간 강원산업은 2000년 당시 인천제철(현 현대제철)에 인수됐다. 현대제철 입장에서도 강원산업을 인수한 것이 기업 발전에 촉매제로 작용했다. 삼표그룹은 현대차그룹 쪽 소유인 성수동 공장을 지금까지 사용해왔고 당진 현대제철에서 슬래그를 공급받아 슬래그시멘트사업 진출을 모색하는 등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있다.
임준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