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리카 김 씨가 지난 3월 9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마친 후 차량으로 향하는 모습(왼쪽)과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지난 2월 28일 오후 서울중앙지검에 소환되는 모습. 부실 수사 논란이 이어지며 특검이 이뤄질 경우 이상득 의원에게 불똥이 튈 가능성이 크다. |
BBK 사건의 핵심 열쇠를 쥐고 있는 에리카 김이 허위사실 유포와 관련 ‘공소권 없음’, 횡령 혐의에 대해서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자 논란은 더욱 증폭됐다. 이미 정해진 결론을 내놓기 위해 검찰이 형식적인 수사를 했다는 주장이 불거졌다. 이와 관련, 에리카 김이 국내에 들어오기 직전 미국 LA에서 여권 중진이자 이명박 대통령 측근 인사 K 씨를 만난 것이 주목받은 바 있다(<일요신문> 982호 보도). 검찰 내에서도 에리카 김에 대한 수사 결과를 놓고 ‘이례적’이라는 평이 우세하다. 에리카 김은 현 정권에 ‘답례’라도 하듯 검찰에 나와 “이 대통령이 BBK 실소유주라는 말은 거짓이었다”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한 전 청장에 대한 수사 역시 그동안 정치권을 달궜던 이 대통령 도곡동 땅 실소유 논란, 정권 실세에 대한 연임 로비 의혹 등에 대한 부분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현재 검찰은 한 전 청장이 2009년 3월부터 올해 2월까지 국세청 직원들을 동원해 몇몇 기업들로부터 7억 원가량의 돈을 받은 사실을 확인하고 그 대가성을 수사 중이다. 또한 한 전 청장이 국세청 차장이던 지난 2007년 인사 청탁을 위해 전군표 당시 국세청장에게 고가의 그림을 선물했던 것에 대해서 뇌물공여 혐의를 적용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개인 비리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에리카 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혹의 ‘핵심’엔 다가가지 못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부실수사’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야권도 가세했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민주당 우려대로 한상률과 에리카 김에 대한 수사가 꼬리자르기로 마무리될 전망”이라며 “얼치기 수사로 진실을 묻으려 하면 땅 속으로 묻힐 것 같지만 언젠가는 폭발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이런 권력형 게이트에 대해 국정조사나 특검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묻으려 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검찰을 압박하기도 했다. 우위영 민노당 대변인도 “초대형 게이트의 주인공인 한 전 청장 수사를 검찰에 맡겨둘 순 없다. 대충 덮고 가려는 수사로는 국민의 의구심과 분노를 해소할 수 없다”며 특검과 국정조사를 요구했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한상률·에리카 김의 입국 및 검찰 수사에 대해 최대한 입장 표현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상하이 스캔들’과 ‘일본 지진’ 등이 잇달아 터지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비껴간 것을 놓고 안도하는 이들도 눈에 띈다. 청와대 정무라인 한 관계자는 “무슨 말을 해도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검찰이 최대한 공정하게 수사를 진행할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야권이 주장하는 특검이나 국정조사엔 반박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MB 대선 캠프 출신의 한 고위 관료 역시 “(특검은) 절대 논의되지 않을 것이다. 이 대통령 뜻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나라당 지도부에도 이러한 의사를 전했다”고 털어놨다.
여권 핵심부가 이처럼 야권의 공세를 사전에 차단하려 한 것은 한 전 청장과 에리카 김에 대한 특검이 이뤄질 경우 이명박 대통령과 이상득 의원에게도 ‘불똥’이 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동안 야권은 이 대통령과 이 의원을 사건의 ‘몸통’으로 지목해왔다. 또한 국회 차원에서 특검 논의가 이뤄질 경우 검찰 수사가 더욱 ‘세질’ 것이란 우려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대검찰청의 한 고위 인사는 “검찰에 대한 자질시비가 제기되고 있는 마당에 특검이 도입되면 국민들의 신뢰가 더욱 떨어질 것이다. 당연히 반대한다. 특검이 본격 논의되면 검찰로선 수사 강도를 더욱 높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특검을 주장하는 야권 인사들을 파악하는 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여의도’ 주변에서는 한상률·에리카 김 관련 특검 혹은 국정조사가 실시될 가능성을 낮게 봤다. 수적 열세에 있는 야권의 일방적인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여권 핵심부가 야권의 요구에 ‘무대응’으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을 이러한 배경에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그런데 최근 상황이 사뭇 달라질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 주류 최대 계파인 이재오 장관 측 일부 인사들이 민주당 의원들과 특검과 관련된 협의를 하기 위해 접촉하는 모습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이 회동 장소였고, 3월 중순경에만 적어도 두 차례 이상 만났다는 게 양측 핵심 관계자들의 일치된 얘기다. 민주당에선 박지원 원내대표와 가까운 한 중진 의원과 초선 의원이, 이 장관 측에선 오래된 측근들이 나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장관 측 입장에선 ‘해당행위’로도 비춰질 수 있는 행동이었는지라 보안에 극도로 신경을 썼다는 후문이다. 이 장관 측 인사들과 특검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진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이 장관 측이) 먼저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밝히기 어렵다”고 말을 아꼈다.
정치권은 이 장관 측 일각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이상득 의원과의 ‘일전’을 염두에 뒀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윤호석 정치연구소’ 윤호석 소장은 “이 장관 측이 대놓고 특검을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곧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항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장관 측근들이 이 의원과 맞서기 위한 여러 대책 중 하나로 민주당과 접촉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 소장은 “검찰과 이 의원 측 모두를 압박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당시 모임에서 이 장관 측 인사들은 에리카 김을 제외하고 한 전 청장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특검을 수용하는 방안에 가장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에리카 김은 이 대통령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지만, 한 전 청장 특검은 이 대통령보다는 이 의원에게 직격타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장관 측의 ‘타깃’이 누구인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장관 측 일부 인사들이 특검에 대해 긍정적인 ‘제스처’를 취한 것으로 전해지자 청와대 내에서도 긴장하는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앞서의 청와대 정무라인 관계자는 “몇몇 인사들의 주장일 뿐”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정치권에서 더 이상 논의가 확산되지 않도록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한나라당 내에서 ‘반 SD 세력’으로 꼽히는 이재오계와 소장파가 야권의 특검에 동조할 경우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권 출신의 한 소장파 의원실 관계자는 “여권 내에서 (특검이) 아직 공론화되고 있는 단계는 아니다. 그러나 정권 출범 이후 이상득 의원과의 힘겨루기에서 번번이 밀렸던 우리나 이 장관 측으로선 검토해볼 필요성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