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 | ||
김 부회장은 지난 4월20일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그룹의 전신인 현대건설은 현대아산과 합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현대측 고위 관계자가 현대건설 인수 의사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대아산측은 “김 부회장이 사견을 전제로 밝힌 것”이라며 “현대아산 차원의 현대건설 인수 계획은 현재로선 없다”고 밝혔다. 현대건설측이나 주요 채권단인 외환은행측 관계자도 “현대아산과 매각 논의를 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김 부회장 발언이 사견이란 전제를 달고 있지만 경영을 책임지는 고위인사의 공개석상 발언이란 점에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현대증권 노조는 지난 4월21일 성명서를 통해 “경영진의 의견이 어떻게 사견이 될 수 있느냐”며 김 부회장을 비판하기도 했다.
현대그룹의 반응도 주목할 만하다. 그룹 관계자는 “그룹 차원에서 검토된 일이 아니며 김 부회장의 개인적 견해일 뿐”이라 밝혔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상의하지 않고 이뤄진 일이라는 설명이다.
김 부회장이 밝힌 현대건설 인수 자금 충당 방법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김 부회장은 사견을 전제로 “1조5천억원에 달하는 대북사업권의 일부를 매각하는 방안”을 거론했다. 현대건설의 시장가치는 현재 2조원 정도로 평가받고 있으며 지분 51%를 사들인다 해도 합병 과정에서 발생할 프리미엄을 고려하면 1조원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 최소 자본으로 소요될 전망이다. 대북사업권 일부매각으론 현대건설 매입이 불가능한 셈. 현대아산 외에 대북사업권을 맡을 다른 기업체를 찾기도 쉽지 않다.
김 부회장이 실현 가능성 희박한 현대건설 매입의사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사전조율 없이 공개적으로 거론한 배경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대북사업에서 김 부회장이 차지하는 상징성과 비중을 강조하려는 포석으로 보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한은 남측과의 교섭에서 오랫동안 연을 맺은 사람이 아니면 극도로 꺼리는 경향을 보여 왔다.
▲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
그러나 현정은 회장은 최근 들어 자신이 직접 대북사업을 챙기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지난 3월 현대아산은 김윤규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키고, 윤만준 상임고문을 신임 사장으로 선임, 공동 대표이사 체제를 구축했다. 현대그룹측은 “김 부회장이 대북사업에 전념할 수 있게 회사 총괄 업무를 윤 사장에게 맡긴 것”이라 설명하지만 경영부분에서 김 부회장의 입지는 줄어든 셈이다. 이번 인사는 현정은 회장이 전격적으로 결정한 것이어서 현 회장이 현대아산 경영진에 대한 본격적인 세대교체를 주도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현 회장이 북측의 남북경협 고위관계자와 면담할 의지를 갖고 있는 점도 이미 알려진 상태다. 앞으로 금강산관광 및 개성공단 등 그룹의 남북경협 사업 전반을 직접 진두지휘할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현대아산의 주력 분야인 대북사업을 현 회장이 직접 지휘할 경우 김 부회장의 입지가 좁아짐은 분명한 일이다. 이런 정황이 대북사업의 간판 역할을 해온 김 부회장이 현 회장의 ‘밀어내기’ 시도에 제동을 걸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현대건설 인수 의사를 흘렸다는 분석으로 이어지는 것.
실제로 김 부회장의 퇴진설은 지난 겨울부터 현대그룹 안팎과 정계 일각에서 꾸준히 흘러나왔다. 결국 정기주총이 끝난 시점에서 ‘부회장 승진’이라는 형식으로 일부 현실화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측과 현대아산측은 “현 회장과 김 부회장 갈등설은 말도 안된다”고 입을 모은다. 현대그룹측은 “두 분 사이가 나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못박는다. 현대아산측은 “김 부회장의 입지 강화를 위한 발언이 아니다. 기자들 앞에서 현대건설 이야기를 처음 했을 뿐 현대건설 사장 출신인 김 부회장은 늘 현대건설에 대해 아쉬워했다”고 반박했다.
한편 김 부회장의 현대건설 발언 이후 현대건설 주가가 상승하고 수주실적이 좋아진 점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주식시장에서 ‘현대왕국 재건도 가능할 것’이란 ‘때 이른’ 전망까지 흘러나오게 됐다. 현정은-김윤규 갈등설의 진위 여부를 떠나 최근 행보를 통해 김 부회장은 계열사에 흩어져 있는 현대건설 출신 경영진 중에서 현대왕국 재건의 기치를 가장 먼저 올린 격이 됐다.
그러나 현대아산 단독으로 현대건설을 인수하기에 무리가 따른다는 점은 김 부회장의 발언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가중시킬 전망이다. 현대증권 노조가 성명서를 통해 “현대건설 인수에 현대증권에서 단 한푼의 자금도 출자할 수 없다”고 밝힌 점도 결국 김 부회장을 겨냥한 셈이다. 현대그룹과 현대건설, 채권단 모두 현대아산의 현대건설 인수 가능성에 회의적 시각을 보이고 있다. 천문학적 액수의 공적자금이 투입돼 회생된 현대건설이 다시 현대의 품에 넘어갈 경우 국민의 혈세로 재벌의 배를 채워줬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도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