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만에 미국에서 귀국해 뇌물수수 및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출두한 한상률 전 국세청장.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한 전 청장은 현 정권 실세들의 이름이 오르내린 각종 대형 사건에 깊숙이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다. 따라서 검찰은 한 전 청장이 귀국하자마자 그를 상대로 ‘그림 로비’ 사건을 비롯해 청장 연임 로비 의혹, 태광실업 특별세무조사 과정에서 빚어진 직권남용 등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사정당국 주변에선 한 전 청장에 대한 검찰 수사 추이에 따라 청와대를 포함한 여권 전체가 격랑에 휩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돌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검찰은 한 전 청장에 대한 1차 소환조사(2월 28일) 이후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렇다할 수사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야권 일각에서 제기됐던 ‘물타기 수사’ ‘봐주기 수사’ 의혹이 현실화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런 와중에 뜻하지 않은 변수가 발생했다. 한 전 청장이 미국 체류 당시 국내 대기업들로부터 자문료 명목으로 수억 원대의 돈을 건네받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 전 청장에게 억대의 돈을 건넨 대기업은 SK텔레콤과 현대자동차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두 대기업은 돈을 건넨 시점을 전 후해 각각 국세청 세무조사와 법인세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SK텔레콤은 지난해 11월부터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데 조사 기간이 두 차례나 연장돼 지금도 진행 중이다. 국세청 주변에서는 SK그룹 계열사에 대한 전 방위적인 세무조사는 결국 최태원 회장을 겨냥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돌기도 했다. 특히 사정당국 일각에서는 검찰과 국세청이 최 회장의 해외비자금 조성 의혹과 관련해 핵심 측근들에 대한 내사에 돌입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현대차를 비롯한 현대차그룹 계열사는 2008년 11월 관할 세무서를 상대로 낸 법인세 부과 처분 취소 소송으로 국세청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다. 당시 국세청은 현대차 계열사에 953억 원(현대차 556억 원, 현대모비스 397억 원)의 법인세를 부과한 바 있다. 현대차그룹과 형제 회사인 현대중공업의 법인세(1006억 원)까지 포함하면 2000억 원대에 달하는 대형 소송이었다. 지난해 6월부터 올 1월까지 1심 재판이 진행됐는데 현대차 계열사와 현대중공업은 모두 패소했고, 현대차 계열사는 항소를 포기해 1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다.
SK텔레콤과 현대차는 한 전 청장에게 수억 원대의 돈을 전달했고, 두 기업 외에 다른 기업 20여 곳도 한 전 청장에게 주기적으로 돈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돈의 성격과 관련해 한 전 청장은 “용역 보고서를 작성해주고 받은 정상적인 자문료”라고 주장하고 있다. SK텔레콤 측은 “SK텔레콤에 대한 세무조사는 지난해 11월에 시작됐고, 한 전 청장은 그 이전인 2009년에 출국했다”며 “세무조사와 무관한 용역 자문료”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현대차 역시 매달 일정액의 자문료 명목으로 건넨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은 ‘도피성 외유를 떠났다’는 의혹을 받았던 한 전 청장에게 기업들이 억대의 돈을 주고 용역을 맡길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검찰은 국세청 업무와 관련된 청탁성 자금일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가성 여부 등 돈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한 전 청장에게 거액의 돈이 건네지는 과정에서 국세청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도 속속 포착되고 있다. 한 전 청장의 최측근이자 현직 지방 세무서장인 장 아무개 씨는 몇몇 대기업을 비롯한 20여 개의 기업이 한 전 청장에게 자문료 명목으로 5억여 원을 전달하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 씨는 2007년 1월 한 전 청장의 지시로 서미갤러리에서 최욱경 화백의 그림 ‘학동마을’을 직접 구입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장 씨는 이달 초 검찰에 소환돼 ‘그림로비’ 의혹을 비롯해 한 전 청장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해 1차 조사를 받은 바 있다. 검찰은 조만간 장 씨를 재소환해 한 전 청장에게 전달된 돈의 정확한 성격 및 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국세청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는지 여부 등을 집중적으로 추궁한다는 방침이다. 검찰은 또 한 전 청장에게 전달된 돈의 출처와 용처를 파악하기 위해 계좌추적도 병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자문료’ 사건 이면에는 국세청의 비호설을 넘어 현 여권 실세들이 개입된 검은 커넥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란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장 씨와 국세청은 중간 메신저 역할만 담당했을 뿐 한 전 청장을 비호할 수밖에 없는 여권 실세들이 배후에서 조종자 역할을 했을 것이란 논리다. 실제로 한 전 청장은 현 정권 실세들을 상대로 한 연임로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야기한 태광실업 표적 세무조사, ‘도곡동 땅 실소유주’ 비밀을 알고 있는 핵심 당사자 등 현 정권의 치부와 맞물린 은밀한 사건에 두루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다.
한 전 청장과 여권 실세, 그리고 일부 대기업이 ‘악어와 악어새’처럼 이해관계가 맞물려 공생의 길을 걸어온 게 아니냐는 이른바 ‘삼각 커넥션’ 의혹이 증폭되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2009년 3월 한 전 청장의 연임로비 의혹이 처음 불거졌을 때 그가 아무런 제재 없이 유유히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는 사실도 검은 커넥션 의혹을 부추기고 있다.
한 전 청장이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의 아들 회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무마해 줬다는 의혹도 여권 실세 비호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검찰은 2009년 11월 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의 부인 홍혜경 씨가 운영하는 가인갤러리 등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한 전 청장의 비리가 적힌 세 가지 문건을 확보한 바 있다. 이 문건 중에는 2008년 초 한 전 청장이 이 의원의 아들 지형 씨가 대표로 있던 회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서울의 한 세무서장에게 지시했다가 이 의원이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나도 모르게 세무조사가 진행됐다”고 이 의원 측에 해명했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안 전 국장은 검찰 조사에서 “당시 한 전 청장의 최측근인 김 아무개 씨가 내 사무실로 찾아와 ‘지형 씨 관련 세무조사를 하고 있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이상득 의원에게 전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선 전 정권에서 임명된 한 전 청장이 현 정권 출범 후 유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전 청장이 지형 씨 관련 세무조사를 무마해줬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나돌기도 했다. 검찰은 최근 안 전 국장과 문건에 등장한 김 씨를 소환해 문건 내용에 대해 강도 높은 조사를 벌인 것으로 확인됐다.
과연 ‘자문료’ 뇌관이 터지면서 새 국면을 맞고 있는 한 전 청장을 둘러싼 각종 의혹 사건이 여권 실세들과 일부 대기업이 개입된 ‘삼각 커넥션’ 사건으로 확전될 수 있을지 국민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