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쏜다>의 한 장면. |
앞서 언급한 설문조사에서 욱하게 만드는 상황으로 가장 많이 꼽힌 이유가 ‘내 잘못이 아님에도 책임져야 할 때’였다. 리서치 회사에 근무하는 K 씨(여·35)는 바로 이런 이유로 얼마 전 불같이 화를 냈다.
“평소에 다른 팀에서 협조 요청이 들어오면 그것부터 먼저 해결해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사님이 고객 불만이 접수된 걸 제 잘못이라고 몰아붙이는 거예요. 알고 보니 저한테 협조 요청을 했던 부서에서 미적거리다 일이 늦어져 불만이 들어온 건데 제가 늦은 탓이라고 책임을 미뤄서 오해하셨던 거죠. 어이가 없어서 일을 제 시간에 마무리 해준 증거자료를 몽땅 모았습니다. 그리고 사장님께 직접 면담을 요청했어요. 평소 조용히 지내던 저였지만 이번만큼은 가만있을 수 없었거든요. 조목조목 따져가며 일을 설명했고 그날 저한테 책임을 떠넘겼던 부서는 크게 질책당하고 이후로도 며칠 동안 팀원들이 야근을 하더군요.”
원단회사에서 일하는 C 씨(여·33)도 답답한 거래처 때문에 욱했던 경험이 많다고 토로했다. 제대로 확인해보지도 않고 먼저 따지기부터 하는 바람에 끓어오르는 화를 참아야 할 때가 많단다.
“주문한 원단을 분명히 몇 번이나 확인하고 보냈는데도 막무가내로 못 받았다고 우기면서 무조건 제 책임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살펴보라고 해도 그냥 또 보내라는 말밖에 안 해요. 억울하지만 다시 보낼 준비를 하면 갑자기 전화가 와서 제품이 있다고 그래요. 그 난리를 부려놓고 사과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혈압이 올라서 뒷목 잡고 쓰러집니다.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저도 질려서 보낼 때 증인에 증거자료까지 항상 철저히 준비해 둡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업체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만 그저 참는 수밖에 더 있나요.”
업무적인 이유 외에도 직장인들이 순간적으로 욱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특히 그 이유가 인격모독에 해당할 때는 참지 못하고 바로 터트릴 때가 많다. 기계부품업체에 근무하는 L 씨(32)는 거래업체 담당자들과 종종 트러블이 발생해 저도 모르게 욱할 때가 많다고 털어놓는다. 어지간하면 참고 넘어가자고 늘 다짐하지만 폭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다.
“기계는 소모품이기 때문에 고장이 날 수도 있고 다른 고장 수리 건으로 바로 달려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사정을 감안하지도 않고 연락해서는 소리부터 지릅니다. 처음에는 저도 쩔쩔매면서 원만하게 해결해보려고 했죠. 그랬더니 점점 더 만만하게 보는 것 같더군요. 하루는 업체 담당자가 소리를 지르다 못해 욕을 하는 겁니다. 순간 저도 흥분해서 전화상으로 있는 욕, 없는 욕 다 하면서 싸웠습니다. 욕을 듣고도 참을 수는 없더라고요. 나중에 상사한테 한 소리 듣긴 했지만 제가 강하게 나가니까 상대방도 어느 정도 숙이고 들어온다는 걸 알았습니다.”
욕이 아니더라도 ‘말’은 언제나 민감하다. 유순했던 사람도 주먹을 쥐게 만든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S 씨(33)는 친한 후배와 한동안 서먹했었다고 털어놨다. 잘 지내다가도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니 참기가 힘들었단다.
“평소에 잘 지내던 후배가 있었습니다. 싹싹해서 일도 많이 가르쳐주고 그랬죠. 그래서 다른 후배들보다는 허물없는 사이이기도 했고요. 하루는 회식 자리에서 술을 좀 마시더니 후배가 슬슬 말꼬리를 짧게 자르는 겁니다. 처음에는 실수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제가 가만히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나중에는 아예 말을 놓고 친구처럼 대하지 뭡니까. 순간 욱해서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후배가 놀랐는지 다시 깍듯이 대하더라고요. 그날 회식 이후로는 90도 인사에 사적인 대화는 거의 안합니다. 좀 어색해진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선배랑 친구처럼 지내려는 후배는 용납할 수가 없죠.”
후배면 바로 혼내기라도 하지 상사가 속을 긁을 때는 스트레스만 심해진다. 직장인을 욱하게 만드는 사람 중 대부분이 상사이기도 하다. 홍보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는 D 씨(32)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직속 상사 때문에 화가 난다고 털어놓았다.
“욱할 때요? 상사가 부르기만 해도 ‘욱’합니다. 분명 본인이 해야 할 일인데도 저한테 떠넘기려고 부르거든요. 제가 해서 결과가 좋으면 본인 공이 되는 거고, 나쁘면 무조건 제 탓이 됩니다. 7시만 되면 칼퇴근을 하면서 못 다한 업무는 저보고 마무리하고 가라고 그래요. 그때마다 속이 터지죠. 귀찮은 일은 다 제 차지입니다. 제가 진행한 프로젝트도 발표는 상사가 해요. 그래야 공을 인정받으니까요. 허무하고 화가 나서 뒤집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죠. 언젠가 한번은 터트려야지, 벼르고 있습니다.”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J 씨(여·28)도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순간적으로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누를 때가 많단다. 경력에 도움 되는 일보다 다른 직원들 뒤치다꺼리에 사무실 내 허드렛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여직원이 혼자예요. 커피 전화 같은 잡일은 당연히 제 일로 여겨지죠. 그것도 억울한데 하루 종일 직원들이 마시고 난 컵까지 치워야 해요. 보다 못한 부서장님이 각자 개인 컵을 사용하라고 지시를 내렸어요. 무용지물입니다. 요즘에도 잠깐 물 한잔 먹는데 유리컵을 사용해요. 출근하면 탕비실 싱크대에 컵이 가득이죠. 그럴 때마다 ‘욱’합니다. 컵을 던져버리고 싶은 욕구를 꾹 참아요.”
누구나 ‘욱’할 때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참는다. 순간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터트리면 어떤 결과가 돌아오는지 빤히 알고 있어서다. 하지만 아무리 인내해도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한번쯤 잠에서 깬 사자가 되거나 핀 뽑힌 수류탄이 되어보는 게 어떨까.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