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7일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 당정협의회에서 한나라당 이주영 정책위의장(왼쪽)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6월 2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GS그룹 회장) 등 경제 5단체장과 오찬간담회를 가졌다. 박 장관과 경제 5단체장이 서로 인사하는 모양새는 박 장관의 소탈하고 겸손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박 장관이 경제단체장들의 두 손을 꼭 잡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반면, 경제단체장들은 박 장관의 인사를 상대적으로 뻣뻣하게(?) 받았다. 강만수, 윤증현 전 장관 당시에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회의에 앞서 인사말을 주고받을 때도 나타났다. 박 장관은 “상반기에 유가나 통신요금 등을 기업들이 솔선해서 인하한 것에 대해 국민을 대신해 감사드린다. 팀워크를 위해 희생번트나 희생플라이를 하면, 타율에서 제외하고 타점은 인정한다. 그만큼 그 희생을 깊이, 값지게 받아들인다는 징표”라고 치켜세운 뒤 “정부는 여러 가지 규제를 줄이고 기업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박 장관의 발언에 고무됐는지 허창수 회장은 “올해 우리 기업들은 120조 원에 달하는 기록적인 투자와 획기적인 고용창출을 계획하고 있다”면서 “활발하고 자율적인 기업 경영이 인정받도록 새로 취임한 장관이 앞으로 많은 역할을 해주시리라 간곡히 부탁한다”고 받았다.
박 장관은 이날 겸손한 모습과 달리 두 곳에 충격을 주는 강단 있는 행보를 보였다. 첫 번째 충격을 준 곳은 여당을 비롯한 정치권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이명박 정부가 추진해온 법인세와 소득세 추가 감세를 철회하기로 방향을 정한 상태였다. 특히 허창수 회장에게 ‘대중소기업 상생을 위한 공청회’ 출석을 요구하는 등 재계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그가 경제 5단체장을 만나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여당 공세는 힘이 반감돼 버렸다.
기업들에게도 선물만 주지는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올해 말 임시투자세액공제를 폐지하고 고용창출투자세액공제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한 것이다. 임시투자세액공제 제도는 정부가 기업의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투자금액의 4~5%를 법인세액에서 공제하는 것이다. 임시투자세액공제는 법인세 감세만큼이나 재계가 가장 강력하게 존속을 요구하는 제도다.
임시투자세액공제 제도는 그동안 수차례 폐지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재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재계의 강력한 로비에 한나라당 등 정치권도 매년 세제개편안 논의 때마다 임시투자세액공제 제도 존속을 주장하면서 폐지안을 백지화해왔다. 하지만 박 장관은 경제 5단체장과의 만남이 있은 지 사흘 뒤인 27일 한나라당과의 당정협의에서 임시투자세액공제 폐지와 고용창출투자세액 공제 제도 도입을 하반기 경제운용 방향으로 정했다.
박 장관의 소신 행보는 6월 23일과 24일 논란을 빚었던 한나라당의 대학등록금 부담 완화 정책 발표 때도 나타났다. 23일 오전 갑작스레 ‘정부와 여당이 전날 긴급회동을 갖고 대학등록금 부담 완화를 위해 총 2조 원(재정 1조 5000억 원, 대학 부담금 5000억 원)을 투입키로 잠정합의했으며 이 내용을 이날 오후에 발표할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나왔다.
이러한 기사 내용에 대해 한나라당은 사실이라고 밝혔고, 청와대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나 박 장관은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기자들에게 “세부안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한나라당에서 더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면서 최종 합의에 이르지 않았음을 밝혔다.
이날 오후 한나라당은 오는 2014년까지 총 6조 8000억 원의 재정과 1조 5000억 원의 대학장학금을 투입해 대학등록금을 30% 이상 인하하겠다고 발표했고, 청와대는 그제야 최종합의안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청와대는 여당의 상황과 입장을 이해한다고 덧붙였다. 청와대와 여당이 이견을 보일 때 정부 측은 발언을 아끼는 것이 상례지만 박 장관은 이러한 상례도 깨버렸다. 박 장관이 핵심 측근인 방문규 대변인을 재정부 기자실로 내려 보내 여당의 대학등록금 완화 정책은 확정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대로 되기 힘들다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박 장관의 이러한 모습을 여당 일각에선 외유내강이라기보다 ‘양두구육’(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고사성어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음을 비꼬는 말) 수준으로 보고 있다.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박 장관이 취임 초기에는 당의 의견을 잘 수용해서 서로 엇박자가 나지 않게 하겠다고 해놓고 앞장서서 엇박자를 내고 있다”면서 “대학 등록금이나 법인세 추가 감세 등에 대한 박 장관의 행보는 현재 여론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여당 관계자도 “박 장관 등 정부 인사들이 대기업을 편드는 인상을 주고 있다”면서 “아주 정신이 나간 듯하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친이계이자 쇄신파인 정두언 의원의 경우 박 장관이 여당의 법인세 추가 감세 철회 등에 반대의견을 내놓는 등 당과 엇박자를 내는 것에 대해 공개토론을 하자고 주장하는 등 당내에서 박 장관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그럼에도 박 장관의 행보는 계속되고 있다. 평소 간부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박 장관은 일요일이었던 지난 26일 갑작스레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최근 공직사회 비위문제가 잇달아 터지고, 전직과 현직 재정부 공무원이 비리 혐의로 수사를 받는 사실이 내부적으로 보고되는 등 불똥이 재정부까지 튀자 강도 높은 쇄신을 주문한 것이다. 그는 이날 각 부처에서 문제가 되는 연찬회에 대한 사전심사제도 운영과 함께 선물 및 기념품 반·출입 규제, 점심식사시간 제한 등을 지시했다.
재정부 관계자는 “정권 말이 되면 ‘늘공’(고시나 공시로 들어와 항상 공무원인 사람)들은 납작 엎드려 마지막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면 됐는데 최근 재정부의 상황은 다르다”면서 “정권 초기에 추진하다 힘이 빠진 정책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재정부가 이명박 정부의 대미를 장식할 부처로 선정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서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