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1일부터 복수노조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무노조’ 경영방침을 고수해온 삼성그룹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
14년여 만이다. 지난 1997년 3월 제정됐던 복수노조 제도는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세 차례 유예된 바 있다. 때문에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부터 2007년까지 노동법 개선에 대한 감시를 받는 등 ‘노동 후진국’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고용노동부는 복수노조제도 시행으로 노조 민주화와 회사 경영 투명성이 동시에 강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에 그간 노조가 없었거나 유명무실했던 대기업들은 복수노조를 하반기 경영의 최대 변수로 꼽고 노조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히 삼성그룹은 그간 무노조 경영 방침을 고수해온 터라 그룹 내 노조 설립 여부를 놓고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삼성그룹 총 67개 계열사 가운데 삼성생명 삼성정밀화학 에스원 삼성증권 등 7개 기업에 노조가 존재하지만 유명무실, 사실상 노조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 상황이 달라지자 삼성그룹은 먼저 복지제도 강화에 나섰다. 인사평가에서 등급이 떨어져도 연봉이 최근 3년 평균 이하로 내려가지 않도록 관련 규정을 개선했고, 건강검진 비용 확대·재택 원격 근무 제도를 도입했다. 삼성은 또한 지난 6월 29일 약 20만 명의 그룹 임직원 모두에게 국민관광상품권 20만 원씩, 총 400억 원어치를 지급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특별히 복수노조 시행을 앞두고 복지를 강화한 것은 아니다”라며 “직원들과 원활한 소통을 통해 노조가 필요 없는 회사 분위기를 정착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노동계에선 삼성의 최근 움직임에 대해 “복수노조의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며 경계하고 있다. 박성식 민주노총 부대변인은 “강압으로 유명한 삼성이다. 그동안 삼성에서 노조 활동이 없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협박 납치 회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재작년부터 삼성은 전 직원을 대상으로, 최근엔 차·부장급 간부들을 대상으로 정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앞으로 노조 결성 움직임이 포착되면 개별 탄압은 물론 노동기반 약화를 위한 물리력을 행사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백혈병 산재 인정 판결을 비롯해 그동안 삼성 내부에 숨겨졌던 문제들이 곧 촉발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이건희 회장의 발언으로 시작된 삼성테크윈 내부 비리 척결 역시 복수노조 탄생을 막기 위한 삼성그룹의 사전 준비란 관측도 있다. 과거 내부 비리에 대해 비공개를 원칙으로 조용히 처리해왔던 삼성의 이 같은 변화가 복수노조 결성을 통해 내부 문제가 폭로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는 것.
게다가 지난 6월 23일 서울행정법원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노동자 2명에 대해 산업재해 인정 판결을 내렸다. 삼성 노동자들의 ‘산업재해인정’ 투쟁이 본격화되면 이러한 영향하에 삼성 내에도 복수노조가 설립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동안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희귀질환을 앓게 됐다고 주장하는 피해자가 벌써 100여 명(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집계)에 이르는 데다 삼성그룹 직원들 역시 사내 게시판에 실명으로 불만 사항을 게재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경영진에서도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노조를 결성할 경우 막을 수 있겠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삼성그룹 내 복수노조가 설립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노동계에선 “당분간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복수노조가 시행되기 전에도 사측의 경계로 설립되지 않았던 삼성 노조다. 복수노조가 허용됐다고 해서 당장 설립 신고서를 들고 나타날 직원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제도 시행 첫날인 지난 7월 1일, 대우증권과 현대증권이 복수노조 설립을 신청한 것처럼 증권업계 특성을 반영한 움직임은 일어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관계자는 “증권회사의 경우 본사는 주식 관리 영업을 주로 하기 때문에 각 지점 영업 직원과 고민하는 내용이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지점 노조가 생겨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각 삼성 계열사 내부 노조 결성 여부는 예측 불가다. 앞으로 계속 지켜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포스코 관계자는 “포스코엔 노경협의회가 인사·복리후생·임금인상 등 노사 협의를 대신하고 있다. 또한 각 공장별로 협의회를 따로 구성해 월 1회 이상 회의를 갖고 문제점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있다”면서 “노조가 설립되더라도 기존 노경협의회 역시 유지될 것이다. 노조와 노경협의회 활동이 중복될 수 있다는 점이 조금 염려스러울 따름”이라고 밝혔다.
노조법 내엔 ‘교섭창구 단일화’ 조항이 있다. 단일 사업장의 여러 노조 가운데 사용자와 교섭할 대표 노조 하나를 정해야 한다는 것. 교섭창구 단일화는 노동조합 간 자율로 하되 단일화가 되지 않으면 모든 노조가 공동대표단을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노조들끼리 ‘노노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
최삼태 한국노총 대변인은 “기존에는 노조가 사측에 교섭을 요청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해야 했다. 하지만 교섭창구를 의무적으로 단일화하면 사용자 측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결국 사용자 측에서 버티다가 협조적인 노조를 따로 결성해서 지원할 수도 있고, 노조마다 차등을 둬서 협박·회유할 가능성도 높다”고 전했다. 노조 간 갈등을 조장해 사용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교섭을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최 대변인은 ‘삼성과 포스코 내부에 노조 결성 움직임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아직 본격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노조 움직임이 보일 때마다 설립을 방해하는 등 탄압이 심했다. 노조 결성 여부를 파악했더라도 섣불리 발설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