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색사회민주당(가칭)’ 창당 작업에 나서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대표를 만나 또 다시 정치실험을 하는 이유를 물었다.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또창당을 하십니까. 아휴, 그냥 이번에는 눈 딱 감고 민주당 공천 받아서 내년에 국회로 들어가세요.”
장기표 대표가 ‘또’ 창당 선언을 하자 주변 지인들이 그에게 보인 첫 번째 반응은, ‘만류’였다. 오랫동안 재야에서 고생했으니 이제 타협도 좀 해서 제도권에서 자신의 정책과 비전을 제대로 한번 펼쳐보라는 염려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예닐곱 개의 정당을 창당했음에도 여전히 ‘재야’에 머물러 있는, ‘실패’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도 어른어른 비쳐지는 것을 그도 알 것이다.
그는 90년 민중당 창당 때가 정치인생에서 가장 아쉬웠다고 한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해 정당법에 따라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던 것. 그 뒤 그는 민주화운동을 벌였던 동료들이 제도권 정당에 들어가 원내 진입에 성공했음에도 진보정당 활동을 고수하다 지난 2000년 4월 16대 총선 당시 민국당으로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2001년에 민국당이 민주당 자민련과 정책연합에 합의하자 ‘당의 정체성이 상실됐다’며 탈당해 푸른정치연합을 창당했다가 2002년 8월 재보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입당, 영등포 을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권영세 후보에 밀려 또 다시 쓴 맛을 보게 된다. 이때가 어찌 보면 여의도 입성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였던 셈이다.
그 뒤로는 또 다시 계속되는 진보정당 창당 실험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정치인의 후회가 서린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제도권으로 들어가 비전과 정책을 실천해 나아가는 것이 정치의 궁극적 목표라는 점에서도 장기표의 정치는 성공하지 못한 것 아닌가.
▲‘왜 당신은 안 되는 일만 하느냐. 다른 사람들은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하는데 부럽지 않느냐’ 이런 말들을 많이 들었다. 특히 언론인들이 그렇다. 모 일간지 중견 언론인을 최근 만났는데 한 30분 동안 나를 붙잡고 ‘새 정당 또 만들어서 고생하려 하느냐. 이번에야말로 민주당에서 공천 받아서 국회의원을 하시라’는 말을 너무 너무 간곡하게 하더라. 90년 민중당 시절부터 같이 해온 기자들도 내게 ‘우리는 대표님한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안타까워한다. 너무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한 번은 성공한 것을 보여줘야 하지 않나.
▲그런데 나하고 비슷하게 하던 사람들 중에 나만 실패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성공한 게 아니다. 누가 성공했나. 성공한 게 아니다. ‘성공을 했다’, 그렇게 말하려면 대한민국을 잘 살게 만들어야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정치인 중에 성공한 사람 있나? 없다. 소위 말한 성공한 정치인들이 지금 대한민국을 잘 살게 하고 있다고 보나. 아니다.
―정치가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들의 비전을 관철시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봤을 때, 언제나 혼자 창당을 해서 대표가 된 것은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나한테 부족한 게 많이 있다. (재야 출신) 우리끼리 한다면 내가 절대로 높은 자리 있지 않고 받들어 모실 건데 그들이 시대착오적인 한나라당에 들어가서 나보고 오라고 하면 들어갈 수 없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들이 더 큰 책임이 있다. 나는 그런 곳에 들어가서 정치를 할 수 없다.
―80년대 재야와 지금의 재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이재오 장관이나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전향’했지만 현실정치 속에서 그들의 정치적 비전을 실현하고 있고, 어찌 보면 정치인으로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 그런 점에서 제도권에 편입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는가.
▲정치인은 성공해야 한다. 그 성공이 뭐냐 하면 집권세력이 되어서 대한민국을 잘 사는 나라로 바꿔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걸 못 해내면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했다고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다. 또 하나는 지금까지 내 뜻이 이뤄질 수 없는 시대적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주장이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시대상황에 처했다. 10년 전에는 사회보장에 대해 사람들이 동의 안 했다. 돈 없고 복지망국론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지금은 제대로 된 사회보장제도를 실현하지 못하면 다 죽게 생겼다. 생태적 삶도 녹색이념도 일본의 원전 방사능 누출 사건을 보면서 새롭게 인식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기존 정당은 이에 대한 체계적 방안이 없다. 내게는 분명한 대안과 답이 있다.
장 대표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정책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을 반짝이며 의자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가 인터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 열변을 토한 노동문제에 대한 천착, 국가 경영에 대한 철학과 비전은 잘 정리된 논문 하나를 읽는 기분이었다.
“지금과 같이 20 대 80의 정보문명시대에는 분배를 안 하면 성장이 안 된다. 20을 가진 국민만 잘 사는데 80은 무소득자이면 아무리 생산해도 유효수요가 없다. 대기업들이 세금을 많이 내서 80 저소득층의 사회적 일자리를 늘려 그들이 상위 20%가 만든 재화를 소비하게끔 해줘야 한다. 대량 실업자 사태가 오고 있지 않느냐. 소득 양극화가 그 후유증 아니냐. 그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의 실현 없이는 20과 80이 모두 죽게 된다. 이것이 문명의 전환이다.”
―장 대표를 보면서 같은 고향(김해 진영)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묘하게 오버랩 된다.
▲내가 진영중 2년 선배인데 조그만 애가 봉하골에서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 뒤 못 보다가 서울 올라와 민중당 창당 때 가까워졌다.
―왜 같이 하지 못했나.
▲그 사람 솔직히 말하면 대학을 못 나와서 학생운동과 대학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그건 나쁜 게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은 학생운동 출신들이 주장하면 괜히 자기도 하고 싶어 했다. 학생운동권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민중당에도 당연히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할 듯 말 듯 하다가 결국 안 했다. 민중당 공천 받아 국회의원 되기도 어렵고 그의 지식으로 민중당에서 버티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그는 부르주아였다. 옷도 최고급 옷을 입고 그랬다. 나처럼 2만~3만 원짜리 와이셔츠가 아니라 최소 30만 원 이상 것을 입었다. 우리와 안 맞는 거지. 그래서 안했지.
―외골수였지만 결국 대통령까지 올랐다.
▲역사적 쾌거다. 우리 사회 기득권층의 학연 지연 돈 모든 것을 깼다. 노 전 대통령 못지않게 기여한 노사모도 큰 힘이 됐다.
―‘장사모’는 없나.
▲옛날에 있었는데 나는 크게 못 만들었다. 역시 한국에서는 큰 정당세력에 붙어야 크는 것이다. 유시민이가 저렇게 큰 것도 노 전 대통령 옆에 붙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유시민은 정치적 미래가 없다.
―꿈이 대통령이라는데.
▲꿈이 대통령이 아니라 집권이다. 내년 총선에서 우리가 최소 10%의 득표율을 얻으면 전국구 6명, 지역구 3~4명 합해서 10명 의원을 배출하면 녹색사민당이 집권한다.
―거대정당의 벽이 상당히 높은데 틈새전략이라도 있나.
▲한나라당이 둘로 쪼개질 수도 있다. 민주당도 언제 깨질지 모른다. 이런 불확실한 때일수록 우리가 제대로 된 정체성을 가지고 중심을 잡으면 거대정당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참여할 공간이 생긴다. 정치권에서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쫓겨나온 사람들이 기존에 있던 사람들을 밀어낼 것이다.
―야권통합과는 배치되는 것인데.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해서 한나라당보다 나은 것이 있겠는가. 한나라당이 잘 못 한다고 해서 급하게 민주당을 앉혀놓았다가 또 후회한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집권 가능성은.
▲박 전 대표는 안 된다. 말을 안 하면 안한다고 신문에 나오는 사람이 아직까지 국민들에게 국가경영의 비전을 제시한 적이 없다. 세종시 수정안 문제도 원칙 때문에 반대한 것이 아니다. 한나라당 당론이 몇 번 왔다 갔다 했는데 원칙이 어디 있나. 그냥 이명박 대통령 ‘쫑크’ 먹이려고 했던 것이다. 충청표를 노린 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정치하면 되나.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어떤가.
▲재야 출신으로 젠틀한 사람이다. 하지만 야당 대표감도 아니고 대권주자는 더 더욱 안 될 것이다. 한나라당에서 장관에 도지사, 심지어 대권주자까지 하려고 했던 사람이 탈당을 한 것은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일이다. 최근 또 실망한 것은 재·보궐 선거 승리 뒤 보인 실망스런 야당대표로서의 행보다. 부산저축은행 사태에 대한 대여 공격력도 낙제점이다. 청와대 회동도 이 대통령 눈치 보느라 야당 대표의 국정감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현실정치에서 장기표는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금배지를 달아도 대통령이 되어도 국민들 삶의 질을 더 낫게 해주지 못하는 정치인에게 성공이란 개인의 영달에 불과할 뿐이다. 그의 실패가 부끄럽지 않은 것은, 출세만능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당당했던 과정에 마침표가 찍히기 때문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친북 노~ 월남 갔다온 ‘군필자’
1. 공고 나와 서울법대…유일한 학생?
월사금 300원 안 내려고 마산공고 장학생으로 갔다. 공고 나와서 서울법대 간 사람은 아마 학교에서 내가 유일할 것이다. 5·16이 나서 산업입국이라고 공고는 수업의 50%를 공업관련으로 채웠다. 공부하기가 더 어려웠다.
2. 고교 때도 데모생?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이 굉장히 강했다. 성한 밥알이 들어있는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촌에서 너무 너무 가난하게 자랐다. 사회는 잘 몰랐지만 기본적인 정의감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 소위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교장 물러가라고. 사회문제가 아니었고 학교 부조리였다. 내가 주도를 했다. 당시에는 교사 자격증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 담임 15명 가운데 2~3명 정도에 불과했다. 학교에서 그런 사람들을 계속 불러들여서, 교장 물러가라고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3.베트남 파병 진짜 사나이?
서울법대 입학하고 1학년 다니다가 영장을 받았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데모를 하다가 학교에 찍힌 것도 있고 해서 영장이 나온 모양이었다. 당시에는 전쟁 끝난 지 얼마 안 되던 때라 군대 안 가려고 굉장히 그랬다. 솔직히 서울법대 한 학년 160여 명 중에 제대로 간 사람 별로 없었다. 우리 동기 때 나를 포함해 5~6명 정도였다. 이들은 대체로 순진했고 촌사람들이었다. 67년 2월 입대해서 8월에 베트남으로 파병됐다. 백마부대였다. 월남전 초반에는 돈 주고 빼고 그런 게 심했다. 나는 갔다. 경비소대에 있었다. 통신병과였는데 자리가 없어 포병대대 경비소대로 떨어졌다. 매일 매복 나가고 제일 위험한 곳에 있었다. 장기표 하면 데모하다가 교도소 가서 군대 안 갔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많을 거다. 당연히 친북일 거고 법대 나와서 더 골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대표적 재야활동가이지만) 내가 월남 갔다 왔다고 하면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주는 것 아닌가.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