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사회적 책임론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부를 쌓아 온 재벌의 소극적인 배려를 질타하고 이익의 사회 환원을 요구하는 분위기다. 기업들에게 있어서 기부는 더 이상 ‘필요’가 아닌, 지속가능 경영을 위한 ‘필수’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때문에 기업의 기부는 해마다 늘어 우리나라 기부금 총액의 60%를 차지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총수 개인의 거액 기부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건 법정에서였다. 재계 1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2위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경영권 편법승계와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법정에 섰던 지난 2006년 각각 8000억 원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5년인 지난 지금 그 약속은 과연 지켜졌을까. 지령 1000호를 맞은 <일요신문>이 추적했다.
이건희 회장이 사회 환원 카드를 꺼내든 건 삼성이 위기에 몰려 있던 지난 2006년이었다. 당시 삼성은 ‘안기부 X파일 사건’과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문제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었다. 결국 삼성은 당시 장기간 해외 체류 중이던 이 회장의 귀국을 계기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며 여론을 달랬다. 이 회장 일가의 재산으로 8000억 원 상당의 사회기금을 조건 없이 헌납하겠단 뜻도 전했다.
이 회장은 사회 환원을 장학재단에 기부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중 4500억 원은 ‘삼성이건희장학재단’의 설립을 통해 이미 사회에 환원된 돈이었다. 이 재단은 지난 2002년 이건희 회장이 1300억 원,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1100억 원, 삼성 계열사가 2100억 원을 공동 출연해 설립됐다. 이 회장은 삼성이건희장학재단에 3500억 원을 기부한 뒤 재단의 기금을 통째로 넘기는 방식을 원했다.
결국 이 회장 일가의 부당이득 헌납분 1300억 원과 이 회장의 셋째딸 고 이윤형 씨의 유산 2200억 원이 더해져 8000억 원 기부 절차는 마무리됐다. 사회 환원 업무는 당시 교육인적자원부로 이관됐다. 교육부는 사회환원기금 8000억 원을 인수받아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을 출범시켰다. 국가기관인 한국장학재단으로 편입시키는 방안이 검토됐지만 논란 끝에 백지화됐다. 이 재단은 현재 ‘삼성꿈장학재단’으로 명칭을 변경해 유지되고 있다.
이에 대해 경제개혁연대는 “재단에 출연한 재산 중엔 이윤형 씨가 보유하던 삼성에버랜드 지분 4.12%를 비롯한 삼성 계열사 주식이 포함돼 있다. 장학재단이 삼성에버랜드 주식을 보유하는 한, 해당 재단으로의 주식 기부는 단순한 명의 변경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며 장학재단과 삼성그룹의 분리 조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재단을 둘러싼 잡음은 계속됐다. 2009년을 기점으로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에 ‘삼성맨’들이 영입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 출신의 손병두 현 KBS 이사장이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뒤이어 삼성생명 자회사인 STS커뮤니케이션 우진중 경영지원실장이 신임 사무총장으로 임명됐다. ‘삼성의 돈을 받았지만 삼성과는 관련 없이 기금을 운용한다’는 재단 방침에 역행한다는 지적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경제개혁연대 김상조 소장(한성대 교수)은 “삼성은 장학재단에 투입된 에버랜드와 삼성SDS 주식이 제3자의 손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고, 매각되더라도 삼성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제3자에게 넘어가길 기대하고 있다”며 삼성꿈장학재단의 독립성에 의구심을 표하기도 했다.
재단 운영에 있어서도 삼성의 색깔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일례로 <일요신문> 취재 결과 최근 삼성꿈장학재단이 장학금을 삼성카드로 지급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재단은 장학생들에게 삼성카드 가맹점으로 등록된 학원에서 강의를 듣는 방식으로 장학금을 지급해 학부모들의 원성을 샀다. 변변한 학원이 없는 시골 학생들로서는 삼성카드로 결제 가능한 학원을 찾는 게 곤란했기 때문이다.
해당 학부모들은 국민신문고를 통해 재단의 장학금 지급 방식에 항의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재단은 아직 사용되지 않은 장학금을 현금으로 돌려줬다. 삼성꿈장학재단 관계자는 “지난해 삼성카드 사용 제도를 시범적으로 시행했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학부모들이 많아 몇 개월 만에 변경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당시 항의를 했던 학부모의 자녀가 최근 삼성꿈장학생에서 탈락하면서 항의에 따른 불이익을 당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꿈장학재단 관계자는 “장학생은 외부 위원회의 객관적인 평가를 거쳐 선정한다”고 밝혔다.
재단은 지난해 6월 부산저축은행이 실시한 1500억 원의 유상증자에 참여했다가 전액 손실을 본 사실이 최근 저축은행 사태로 드러나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금융계에선 투자 결정에 관여한 인물들이 학연과 지연으로 얽혀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처음 사모펀드를 만들어 투자를 제안했던 장인환 KTB자산운용 대표가 부산저축은행 대주주인 박연호 회장의 광주일고 후배인 데다가 삼성꿈장학재단의 기금운용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
게다가 재단 기금관리를 맡았던 일부 위원들이 “PF대출 문제로 저축은행 부실이 우려되기 때문에 투자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묵살됐다고 밝히면서 이를 둘러싼 의혹은 더욱 증폭돼갔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지난 4월 국회 청문회 때 포스텍은 나름의 해명을 했지만 삼성재단은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경제개혁연대가 저축은행 투자 관련 질의서를 보냈는데 투자 과정 및 내용이 담긴 답변을 해준 포스텍과 달리 삼성재단은 어떠한 답변도 해주지 않았다”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삼성꿈장학재단 기금운용팀 관계자는 “현재 KTB자산운용에 투자 손실로 인한 책임을 묻기 위한 소송을 준비 중이다. 소송 상대방 입장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그 절차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재단에선 투자 관련 해명을 따로 하지 않기로 내부적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 2006년 교육부가 삼성그룹에서 기부받은 에버랜드 주식 10만 6149주(지분율 4.25%)의 향배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교육부는 지난해 감사원으로부터 이를 처분해 장학 사업에 활용하라는 지적을 받았고, 그해 12월 한국장학재단에 지분을 인계했다. 그런데 지난 5월, 한국장학재단이 보유하고 있던 삼성에버랜드 지분을 블록세일(대량매매) 방식으로 처분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현재 에버랜드 주당 가치는 210만 원 정도로 지분 매입을 위해선 2000억 원 이상이 필요하다. 재계에선 에버랜드가 삼성의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회사인 만큼 삼성이 계열사를 동원해 이번 블록세일에 참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삼성이 한국장학재단에 기부한 에버랜드 주식을 다시 사갈 경우 대내외적인 비난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8000억 원 사회 환원을 완료했다고 주장하는 삼성이 지배 구조 강화를 위해 기부한 주식을 다시 사가는 것은 모순되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 역시 지난 2006년 1조 원에 달하는 사회 환원을 약속했다. 역시 비자금 등과 관련해 검찰의 수사를 받던 중 나온 결심이었다. 정 회장은 회사 돈 696억여 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횡령하고 계열사에 2100억 원대의 손실을 끼친 혐의로 기소됐다.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온 그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재판부는 “2013년까지 매년 1200억 원씩 모두 8400억 원을 저소득층을 위한 문화시설 건립과 환경 보전사업 등에 쓰라”고 판결했다.
정 회장은 항소심 공판에서 비자금 조성과 관련한 대국민 사과와 함께 1조 원을 조건 없이 사회에 환원하고, 조만간 사회공헌위원회를 발족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환원을 위한 재원 마련 방법에 대해서는 입장을 수차례 번복했다. 2006년 3월 재판 당시 “글로비스 주식을 내놓겠다”고 밝혔던 정 회장이 5월부터 “현금이 될지 뭐가 될지 알 수 없다”며 글로비스에 대한 언급을 피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차그룹에서 글로비스가 갖는 위상 때문이다. 글로비스는 현대·기아차의 부품이나 완성차 수송대행 같은 계열사 발주 물량을 독식해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다. 정 회장의 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31.88% 지분을 보유한 최대주주이기 때문에 글로비스 지분 매각을 통한 사회 환원은 경영권 승계의 걸림돌이 됐던 것.
그런데 항소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되면서 정 회장은 사재 출연을 해야 할 법적 의무가 사라졌다. ‘기고, 강연 및 사재출연’이라는 기이한 형태의 사회봉사명령이 대법원에서 뒤집혀 파기환송심을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사회봉사명령 300시간으로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법원의 판결을 받은 지 겨우 두 달 만에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자에 포함되면서 ‘재벌총수 봐주기’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참여연대는 당시 “법원이 정 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선고의 사전절차로 사재 출연 계획을 종용한 것 아니냐”면서 “범죄 행위를 돈으로 해결하려는 재벌의 잘못된 태도를 법원이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꼬집었다.
반대로 정 회장이 2008년 300억 원어치의 글로비스 주식 48만여 주를 추가로 내놓은 것이 8월 특별사면을 앞두고 여론 악화를 의식한 출연이었단 지적도 있었다. 정의선 부회장의 지분은 놔두고 자신의 재산만 출연한 것이 차후 후계구도를 염두에 둔 행보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정 회장은 특별사면 발표 후 “사회공헌 활동은 예정대로 진행되며 사회봉사도 자발적으로 수행하겠다”면서 약속 이행에 대한 의지를 보이며 논란을 잠재웠다.
그렇다면 정 회장은 5년 전 약속을 얼마나 이행했을까. 결론적으로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그동안 2007년 600억 원, 2008년 300억 원, 2009년 600억 원, 세 차례에 걸쳐 총 1500억 원 상당의 글로비스 주식을 ‘해비치사회공헌문화재단’에 기부했다. 항소심 재판부 판결인 8400억 원을 기준으로 하면 17.86%, 정 회장이 언급한 1조 원을 기준으로 보면 15%에 불과하다. 이후 2년 동안 더 이상의 기부는 없는 상태다. 법적 의무는 없지만 당시 재판부가 사회 환원 기한으로 잡았던 2013년까지 불과 2년도 남지 않았다.
정 회장은 과연 기한 내에 애초 약속했던 1조 원 기부를 모두 이행할 수 있을까. 재계 관계자는 “2006년 당시는 법원의 판결을 앞두고 사회 환원 약속을 했을 것”이라면서 “법적 책임이 없어진 데다 경영권 승계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니 기부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고 관측했다.
사회봉사명령 역시 마찬가지다. 특별사면 당시 정 회장이 사면 정보를 입수해 봉사명령을 회피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주광덕 한나라당 의원은 “정 회장이 2008년 6월부터 일정하게 사회봉사명령을 이행하다 8월 2일을 마지막으로 갑자기 이행하지 않았다. 이는 본인이 사면될 것이란 정보를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면 이후 정 회장이 사회봉사명령을 이행한 흔적은 없다. 사면 전 이행했던 200시간을 제외하고 100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다. 물론 사면을 받았기에 법적 의무는 없지만 본인이 수행하겠다고 선언한 만큼 도덕적 비난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정 회장은 또한 대국민 사과 당시 중소기업 협력사 지원 방안을 마련해 지속적으로 추진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역시 역행했다는 평가다. 현대차그룹의 물류업체인 글로비스에서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가 최대 규모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글로비스는 지난해 총매출 5조 8334억 원의 89.3%에 해당하는 5조 2115억 원을 관계사 매출로 실적을 올렸다.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는 고스란히 중소업체들에 막대한 피해로 이어진다. 이렇게 중소기업의 영역을 침범해 얻은 이익은 편법 상속을 통한 ‘부의 대물림’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
2011년 상반기 미국 시장에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린 현대자동차다. 이익이 큰 만큼, 80% 이상 남은 사회 환원 약속을 하반기에 이행할 계획은 없을까. 현대자동차 측은 “해비치재단을 통해 사회공헌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열심히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