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은 서울 중구 을지로 소재 동양종합금융증권 본사 건물 전경과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오른쪽은 서울 남영동 소재 오리온 본사 건물 전경과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지난 1989년 이양구 회장이 별세한 후 동양·오리온그룹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위기업’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2002년 동양그룹과 오리온그룹으로 분리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동양·오리온그룹은 사위경영의 모범으로 꼽혀왔다. 그러나 최근 두 기업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잇따라 들려오면서 사위경영이 시험대에 오르는 듯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동양·오리온그룹을 중심으로 사위경영의 현주소를 짚어봤다.
“차라리 내가 저 자리(피고인석)에 있으면….”
지난 9일 이화경 오리온 사장은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법정에 나가 재판부에 “담 회장의 경영 복귀 기회를 한 번만 주신다면 나의 모든 걸 걸고 정말 잘하겠다”며 남편인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의 선처를 눈물로 호소했다. 지난날을 회고하며 선처를 부탁하는 아내를 보며 피고인석에 있던 남편 담철곤 회장도 눈물을 훔쳤다.
담철곤 회장은 지난 6월 13일 회사 돈 226억 원을 횡령하고 74억 원을 정해진 용도나 절차를 따르지 않고 사용해 배임한 혐의로 구속 기소돼 이날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담 회장은 임원 급여를 가장해 회사 돈을 횡령하고 사택 관리 인력의 인건비를 10년간이나 회사 돈으로 지급하는가 하면 계열사 자금으로 자녀들에게 람보르기니, 벤츠 등 고급 외제차를 사주기도 했다.
담 회장의 변호인 측도 이 같은 부분을 인정했다. 다만 계열사 법인 자금으로 해외 유명 작가들의 미술품을 구입해 자택에 걸어놓은 것은 횡령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소유할 의사가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다른 곳이 아닌 자택에 걸어놓고 감상한 것은 소유로 봐야 한다는 검찰 주장에 맞선 것이다.
이화경 사장은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뚜렷한 정황이 없고 경영 공백 상태를 우려해 입건유예됐다. 다시 말해 무죄가 확실하다는 것이 아니라 회장이자 남편이 구속 기소된 상태기에 현재로서는 ‘문제삼지 않겠다’, 즉 ‘사건화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 사장의 표현을 빌리면 담 회장 구속으로 현재 오리온은 “해외시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또 “그룹의 최대 위기”라고도 했다. 2002년 9월 동양그룹과 계열분리한 후 최대 위기인 셈이다. 2005년에는 한국능률협회 선정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데다 ‘초코파이’의 정(情)을 나누는 기업 오리온이 담 회장의 횡령·배임 혐의로 이미지 면에서도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담철곤 회장의 비자금 조성 혐의와 구속 기소는 곧바로 ‘사위기업’에 대한 이야깃거리를 몰고 왔다. 공교롭게도 금융감독원의 정태영 현대카드·캐피탈 사장에 대한 징계 일정과 겹치면서 이야기를 더욱 증폭시켰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둘째사위인 정 사장은 지난 4월 현대캐피탈 고객 175만 명의 정보가 유출된 해킹 사건으로 수위 결정만 남았을 뿐 금융감독원의 징계를 앞두고 있다. 해킹 사건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사고 예방 대책을 소홀히 했다는 이유다.
오리온과 동서기업이자 또 다른 대표 사위기업인 동양그룹도 사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동양과 오리온의 총수는 모두 고 이양구 회장의 사위들로서 현재현 동양 회장이 첫째 사위, 담철곤 오리온 회장이 둘째 사위다.
동양그룹은 핵심 계열사이자 지주사 격인 동양메이저가 자본잠식 등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맞으며 휘청거렸다. 동양그룹은 2009년 채권단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는 등 유동성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동양메이저를 축으로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애쓰기도 했지만 동양메이저가 자본잠식에 빠지면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동양메이저와 동양매직의 합병, 동양메이저 주식의 액면감액(5000원→500원), 동양메이저의 3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 등으로 동양메이저의 상장폐지 위기를 모면하고 재무구조 개선에도 박차를 가했다. 계열사들이 분산 보유하고 있던 알짜 회사 동양생명의 지분 46.5%를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보고펀드에 매각하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시행했다.
그럼에도 동양그룹의 유동성 위기설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7월 25~26일에는 동양종금증권에 대한 매각설, 유상증자설까지 나돌았다. KB금융지주가 동양종금증권을 인수한다거나 동양종금증권이 KB금융지주를 상대로 수천억 원대의 유상증자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
이 소문은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이 생명보험사와 저축은행 등에 대한 인수 의지를 밝힌 사실과 맞물리면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동양종금증권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으나 이 같은 소문이 곧바로 잠잠해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동양그룹의 상황이 간단치 않다는 방증인 셈이다.
동양그룹 위기의 진원지는 자본잠식 상태까지 가면서 상장폐지 위기에 몰렸던 동양메이저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때 동양메이저가 공격경영에 나선 것이 패착이라는 분석이다. 금융위기 때 대부분 대기업은 투자를 보류하고 현금을 쌓아두었던 반면 동양메이저는 440억 원가량을 투자해 레미콘·골재 공장을 신설하거나 인수했다.
하지만 건설경기가 장기 침체에 빠지면서 동양메이저의 실적은 급격히 추락했고 결국 자본잠식 상태까지 이르렀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핵심 계열사이자 지주사 격인 회사가 자본잠식에 빠질 정도라면 그 위기의 심각성을 짐작하고도 남지 않겠느냐”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사위기업이자 동서지간인 두 그룹의 총수는 출신과 경력도 이채롭다. 현상윤 전 고려대 총장의 손자인 현재현 회장은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고시에 합격한 수재다. 고 이양구 회장의 맏딸 이혜경 동양레저 부회장과 중매 결혼한 현 회장은 부산지검 검사로 재직 중이던 1977년 동양시멘트 이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경영수업에 들어가 지금의 회장 자리에 올랐다.
현 회장은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국제금융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등 금융 분야에도 상당한 지식과 실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동양그룹이 수차례 위기를 극복하고 고비를 넘기고 있는 것은 현 회장의 금융 지식과 기법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고 이양구 회장의 둘째딸 이화경 오리온 사장과 담철곤 회장은 외국인학교에 다니던 중학생 시절부터 알게 돼 연애결혼을 했다.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이 사장이 지난 9일 법정에서도 밝힌 것처럼 애틋하다. 집안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한 담철곤-이화경 부부는 재벌가 중에서 금슬 좋기로 유명하다.
현재현-이혜경 부부와 담철곤-이화경 부부가 함께 경영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점은 공통점이다. 그러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회장, 한미재계회의 위원장 등 재계를 대표해 대외활동도 활발히 해온 현재현 회장과 달리 담철곤 회장은 대외활동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담철곤-이화경 부부는 둘 다 수려한 외모를 지녔고 금슬도 좋은 덕에 선한 이미지가 각인돼 있었다. 특히 담 회장은 자사의 대표 상품인 ‘초코파이’ CF에 출연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런 담 회장이 회사 돈을 개인 용도로 마구 썼다는 사실은 재계는 물론 일반인에게까지 충격을 줄 만했다.
동양·오리온그룹의 위기와 이미지 실추가 재계에 사위경영을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사위경영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다만 취약한 지분과 오너 출신이 아니라는 점 등이 콤플렉스로 작용해 책임경영과 권한 강화에 어려움이 많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화경 사장도 법정에서 “회장은 남편이지만 창업자의 딸이자 대주주로서 내가 권한을 더 많이 행사할 때도 있었다”며 “남편이 소외감을 많이 느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여자건 남자건 간에 재벌가와 결혼해 경영에 참여한다는 것이 그리 쉽고 좋은 일만은 아니다. 더욱이 ‘여자 잘 만난 남자’라는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두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그럼에도 회사 내부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오너 일가에다 대주주인 처가 식구들이 회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생활용품업체 A 사도 한때 사위에게 임원-계열사 대표 등을 맡긴 적이 있다. 외아들이 있으나 미국에서 학문에만 매진할 뿐 회사 경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 이 업체를 잘 아는 사람의 말이다. 회장인 장인과 부회장인 부인 사이에서 A 사의 사위는 기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A 사 내부에는 파다했다.
결국 몇 년 전 A 사의 사위는 회사에서 내몰리다시피 나갔으며 이들 부부는 이혼하고 말았다. A 사의 한 관계자는 “대외적으로는 경영 실패의 책임을 물은 것이지만 당시 우리(직원들) 사이에는 별별 이야기가 오갔다”고 귀띔했다. 사위가 회장(장인)과 부회장(부인)에게 심하게 질타당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만 34세에 그룹 부회장이 된 담철곤 회장은 화교 출신에다 대학도 미국에서 졸업해 혈연·학연·지연마저 없었다는 것이 이화경 사장의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경영자에게 필요한 도덕적 책임의식과 준법정신을 대신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 재계 관계자는 “현재현·담철곤 회장을 비롯해 우리나라 재벌가들의 사위들이 더는 ‘여자 잘 만난 것 하나 때문에…’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면 사위라는 이유로 받는 스트레스와 소외감은 자기 몫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재벌가 사위가 되고 경영에 참여하려 했다면 그 정도 스트레스는 이미 각오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정태영 잘나가다 훅~ 신성재 뭘 해도 훨훨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의 두 사위도 계열사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은 세 명의 사위를 맞았다. 1남 3녀 중 막내 정의선 부회장을 제외하고 장녀 정성이 이노션 고문의 남편 선두훈 선병원 이사장, 차녀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의 남편 정태영 현대카드·캐피탈 사장, 삼녀 정윤이 해비치호텔&리조트 전무의 남편 신성재 현대하이스코 사장이 그들이다.
이 중 둘째 사위인 정태영 사장과 셋째 사위인 신성재 사장이 최근 재계에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공과대(MIT)대학원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정태영 사장은 현대종합상사, 현대정공, 현대모비스, 기아차 등 계열분리 전 현대그룹에서 정몽구 회장 영역의 계열사를 두루 거쳐 현대차그룹이 다이너스카드를 인수한 후 현대카드·캐피탈 사장에 이르렀다.
정태영 사장은 슈퍼매치, 슈퍼콘서트 등 기발한 마케팅과 공격적인 경영으로 다이너스카드 시절 존재감마저 미미했던 회사를 업계 2위까지 끌어올리며 승승장구했다. 정몽구 회장이 가족 중 누군가 언론에 주목을 받거나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데도 정 사장만큼은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만큼 화제의 인물이었던 셈.
하지만 정 사장은 지난 4월 해킹 사건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2분기 실적도 부진해 업계 2위 자리를 삼성카드에 내준 현대카드는 신한카드에도 뒤져 업계 4위로 추락했다. 8월 중 내려질 것으로 보이는 징계를 기다리는 정 사장은 현재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인 정 사장과 달리 정몽구 회장의 셋째 사위인 신성재 사장은 대부분 현대하이스코에만 몸담았다. 그동안 김원갑 부회장과 함께 공동대표이사 체제에서 올해 초 단독 대표에 오른 신 사장은 올 상반기 매출 3조 3285억 원, 영업이익 1865억 원, 당기순이익 1370억 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지난해 동기 대비 30.5% 증가한 것이다. 1분기 대비 2분기 영업이익 증가율은 40.9%로, 포스코(34.3%)와 현대제철(29.2%)을 모두 앞질렀다.
지난 4월 한국철강협회 강관협의회 회장에 선임된 신 사장은 전 세계를 돌며 유럽과 중남미에 대한 투자를 진행, 글로벌 경영에도 힘쓰고 있다. 또 2013년까지 9220억 원을 투자해 당진에 연산 150만 톤(t) 규모의 제2냉연공장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그야말로 손대는 일마다 뜻대로 돼가고 있는 것이다.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