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 G20 기업자금지원 경진대회 시상식장에 들어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지난 5일 국제적 신용평가사 스탠더드 앤 푸어스(S&P)가 미국 국가신용등급을 한 단계 강등하자 세계 금융시장에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닥쳤다. 미국 다우존스 지수는 심리적 지지선으로 불리는 1만 2000선이 무너졌고, 세계 각국의 증시가 급락했다. 문제는 세계 각국 증시 중에서 한국 증시의 하락폭이 가장 컸다는 점이다.
지난 8월 1일 2172.31이었던 코스피지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제로(0)금리’ 안이 발표되기 전인 9일까지 17.1%나 급락했다. 반면 같은 기간 동안 일본 니케이지수는 10.2% 하락했고, 대만 가권지수는 13.9%, 홍콩 항셍지수는 6.6% 떨어졌다. 이번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의 다우존스지수도 같은 기간 7.4% 하락하는 데 그쳤다.
이처럼 우리나라 증시가 급락한 것은 외국인들이 국내 주식을 투매한 탓이다. 장중 코스피지수 1700선이 붕괴된 지난 9일 외국인 무려 1조 1756억 원의 국내 주식을 순매도했다. 이는 외국인 역대 순매도 규모 중 네 번째로 많은 것이다. 주식 시가총액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3분의 1에 이르고 있어 이들의 매도 행렬은 주식시장을 크게 흔들어놓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흐름은 지금껏 우리가 겪었던 위기 상황이 여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우리 경제는 튼튼한 기초체력(펀더멘털)에도 불구하고 외화유동성 위기로 국가 경제가 뿌리째 흔들렸다. 1997년 당시 정부는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이 튼튼하다. 위기는 장단기 외채의 일시적인 불일치 때문이다”고 했지만 결국 국가는 부도가 났다. 외환보유액과 단기외채비율을 과소평가하고 환율 방어를 위해 무리하게 외환보유액을 쓰다가 판이 깨진 것이다.
2008년에도 정부는 “경제의 펀더멘털이 튼튼하다. 외환보유액이 충분하다”고 했지만 외화자금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가면서 부도위기에 몰렸다. 당시 우리나라가 미국과 통화 스와프(국가 간 통화 교환)를 맺지 않았다면 또다시 부도가 났을 것이라고 경제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우리나라가 위기에 몰리는 것은 펀더멘털보다는 외국인이 자금을 쉽게 투자하고 회수할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외환자유화 수준은 선진국에 버금간다. 미국이나 영국 등 금융 강국만큼이나 외화자금이 쉽게 들어왔다 쉽게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이나 영국처럼 외환시장의 규모가 클 경우 외화자금의 급격한 유출입에도 시장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외환시장 규모가 작을 경우 외화자금 유출입에 의해 시장 자체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면서 “이 경우 환율이 급변동하게 되고 그러면 환율차익을 노리는 외환투자자들의 자금 유출입이 발생하면서 외환시장 불안이 커지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는 “소규모 개방경제의 한계”라면서 “시장 규모가 커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보탰다.
외국인의 자금 유출입에 제한을 둘 수 있는 기회는 지난해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신흥국에 투자됐던 자금들이 대거 회수되면서 신흥국들은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외국인 자금에 덴 신흥국들은 앞 다퉈 국내에 유입된 외국인 자금이 함부로 나가지 못하도록 단기 투자 자금에 대해 각종 세금을 부과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신흥국들이 외화자금 유출입에 일정한 규제를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금융산업이 발달한 선진국에서 지나친 규제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이러한 문제는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회의에서 주요 안건으로 다뤄졌다. 문제는 당시 외환자금 유출입 제한을 강화하는 방안이 추진됐지만 G20 의장국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이를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가 의장국이 된 것은 미국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던 데다, 우리 스스로 선진국과 신흥국 간 가교 역할을 맡겠다고 공언을 한 상태에서 외환자금 유출입 제한을 앞장서서 강화하기는 어려웠다.
지난 7월에서야 외국계은행 국내지점과 국내 시중은행들에 대해 선물환포지션(자기 자본에서 선물환이 차지하는 비중)을 기존보다 각각 50%, 10% 축소하는 정책이 시행됐다. 8월부터는 예금이 아닌 외화부채에 대해서 상환만기에 따라 0.02~0.2%포인트의 은행세를 물리기로 했다.
기획재정부 당국자는 “우리나라는 기업들의 선물환 비중이 높아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가 해외로 그대로 빠져나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단기 외화차입금이 높아지는 문제가 있다”면서 “정부의 선물환포지션 축소조치와 은행세 부과는 이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외채에서 문제가 되는 단기외채 비중 증가도 우려되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외채는 6월 말 현재 396억 달러인데 이 가운데 단기외채비율이 38.2%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47.2%에 비해서는 크게 낮아진 수치지만 여전히 단기 외채 비중이 높은 편이다. 또 지난해 말 37.5%와 비교해 최근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최근 미국발 위기가 커지자 “은행들이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절대 믿지 말라. 내가 세 번이나 속았다”며 외화유동성 확보를 강조한 것도 이러한 위기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조치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이번 미국 재정 불안 상황에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경제의 무역의존도는 85% 수준으로 G20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 세계 경제 1위인 미국이 기침만 해도 한국 경제는 심한 몸살을 앓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미국의 재정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의 불안한 행보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차기 한국경제학회장에 내정된 이만우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소규모 개방경제여서 항상 대비를 해야 한다. 1997년과 2008년 경험이 있어 아직까지는 잘하고 있지만 금융기관의 외환건전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면서 “우리나라는 직접 위기를 겪지 않더라도 교역상대국이 신용위험에 처하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서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