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상선이 관례를 깨고 현대중공업이 아닌 대우조선해양에 컨테이너선을 발주키로 해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사진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같은 날 현대상선 측은 주가 안정과 주주 가치를 제고하기 위해 현대증권을 통해 자사주 신탁계약 800억 원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10일 알려진 이 두 가지 결정은 모두 현대상선 측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이 같은 결정은 모두 그룹 회장인 현정은 회장의 ‘여장부다운’ 결단이 또 다시 발휘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6590억 원 규모의 컨테이너선 발주를 대우조선에 하기로 했다는 소식 앞에서는 ‘과연 현 회장답다’는 말이 나올 법했다.
현대상선 측이 “대우조선이 모든 면에서 가장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많은 이들은 현대상선이 대우조선을 선택한 배경에 현대중공업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 23.66%(현대중공업 16.35%+현대삼호중공업 7.31%, 2011년 7월 7일 기준)가 있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그 지분을 계속 보유하고 있는 이상 안정적인 지분을 확보하지 못한 현정은 회장이 그룹을 경영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현대상선은 현대그룹의 지배구조에서 핵심 계열사다. 현대그룹은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상선을 지배하고 현대상선이 현대증권·현대택배·현대아산을 지배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룹의 지주사 격은 현대엘리베이터지만 현대상선은 그룹의 핵심 연결 구실을 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상선 지분에서 밀릴 경우 그룹 전체 경영권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현대엘리베이터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과 우호지분까지 합해 현정은 회장 쪽 지분이 39.47%로 15.81% 많다. 하지만 유동주식이 있어 작심만 하면 어느 쪽이든 지분을 늘릴 수 있다. 지분율이 다소 앞선다 해도 현정은 회장 입장에서는 늘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
현대그룹 측은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현대중공업 측에 현대상선 지분을 팔 것을 수차례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그룹의 요구를 현대중공업이 번번이 거절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실패했지만 현대그룹이 지난해 현대건설 인수전에 결사적으로 달려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당시 현대건설이 보유하고 있던 현대상선 지분 8.3%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현대그룹의 모태에다 세계적인 기업인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것도 무시하지 못할 과업이지만 내심 현대건설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이 더 급했던 것이다. 그 지분만 확보한다면 경영권은 안정권에 접어든다.
이에 현정은 회장은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여러 차례 ‘통큰 결단’을 내린 바 있다. 인수전을 앞두고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현대그룹에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을 것을 주문했다. 현대그룹은 ‘의도성’이 짙다며 발끈했다. 인수전이 코앞인데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는다면 현대건설 인수는 물 건너가는 일이 돼버리는 것이다. 현대그룹은 주채권은행 변경을 요청하고 주거래은행까지 바꾸겠다며 외환은행에 채무를 갚아나갔다. 또 인수전이 본격화하면서는 파격적인 광고전으로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이번 컨테이너선 발주 결정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현대중공업에 현대상선 지분을 풀어줄 것을 요청함과 동시에 그룹 경영권 방어 의지를 강하게 피력한 것이다. 800억 원 자사주 신탁계약도 마찬가지다. 자사주 매입이어서 당장 의결권은 없지만 훗날 경영권 분쟁이 붙거나 경영권을 방어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다른 곳에 매각해 우호지분으로 돌릴 수 있다.
일각에서는 아직 계약이 완전히 성사된 것도 아닌데 선박 발주를 발표한 것은 다분히 ‘위협용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그러나 “이사회에서 결정한 것이며 앞질러 발표한 것이 아니라 외신에서 먼저 보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경영권 위협이 현실화하지 않는 상황임에도 현정은 회장은 왜 현대중공업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을 껄끄러워하는 것일까. 증권가 관계자는 “지분을 다량 보유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측이 주주총회 등에서 현대상선의 의도를 몇 차례 무산시키는 등 경영의 발목을 잡은 일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난 2007년과 올 3월 주총 때다. 2007년 주총에서 현대상선은 전환사채와 신주인수권부사채의 제3자 배정에 관한 정관을 변경하려 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의 반대로 정관변경안은 부결됐다. 또 올해 3월 주총에서는 우선주 발행한도를 2000만 주에서 8000만 주로 늘리자는 정관변경안을 현대중공업이 주축이 돼 반대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그런 식으로 견제 받는다면 경영진 입장에서는 경영하기가 상당히 곤란하다”며 “안정적인 지배에서 책임경영과 추진력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 임원은 또 “적대적 M&A(인수·합병)에 노출돼 있어 신규투자와 신성장동력을 마련하는 데 투입해야 할 자금을 만일에 대비해 비축해두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 측은 “정관변경안이 주식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었다”며 “주주 이익에 침해되는 일이기 때문에 반대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이번 발주건과 관련해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현대상선에서 심사한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이를 지분 문제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잘라 말했다. 지난 2006년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 지분 매수로 시작된 ‘형수와 시동생의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될 듯하다. 현대상선 지분율에 변화가 없는 한.
임형도 기자 hdl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