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겨울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도심의 거리. 살을 에는 날씨에도 황종대 할아버지(72)는 어김없이 수레를 끌고 집을 나선다. 부지런히 움직인 만큼 폐지를 주울 수 있기 때문에 여유를 부릴 새 없는 할아버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손수레를 끌고 하루 종일 거리를 오가는 일이 쉽지 않지만 할아버지가 이 일에 열심인 이유가 있다. 바로 할아버지의 손자, 정호(9)를 위해서다. 직장을 다니던 둘째 딸이 어느 날 집에 와 두고 간 손자 정호.
당시 정호는 태어난 지 막 백일을 넘긴 터였고 그 이후 딸은 소식을 끊었다. 야속한 딸 대신 손자를 끔찍이 아끼며 돌봐온 할아버지. 이후 정호는 할아버지의 가장 귀한 보물이 되었다.
올해 아홉 살이 되었지만 또래보다 작은 체구로 예닐곱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정호가 걱정인 할아버지는 폐지를 많이 주운 날이면 시장에 들러 정호가 좋아하는 재료를 사서 반찬을 만들어 주곤 한다.
귀한 보물 정호를 위해 할아버지는 오늘도 낡은 수레 가득 폐지를 쌓아 올리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의지할 부모도 없이 어린 시절부터 혈혈단신 홀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왔던 할아버지. 고된 세월이었지만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강단 하나로 버텨온 삶이었다. 그렇게 강했던 할아버지는 정호를 맡아 키우게 된 이후로 울보가 되어 버렸다.
황혼의 나이에 다시 시작한 육아에 힘든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였겠느냐만 지금도 할아버지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이 하나 있다. 정호가 어린이집을 다니던 시절 하원 시간이 되면 엄마 아빠들이 찾아와 친구들을 데려가는 모습을 보고는 할아버지에게 왜 나는 아빠도 안 오고, 엄마도 오지 않냐고 물었던 정호.
행여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될까 엄마에 대해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남몰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돈 벌러 간 엄마가 언젠가는 자신을 보러 올 거라고 믿고 있는 정호에게 할아버지는 오늘도 하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건강이 악화되는 할아버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언제까지 폐지를 주울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할아버지는 정호를 위해 꼭 해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하루하루 벅찬 상황이지만 폐지를 수거해 번 돈 중 생활비로 필요한 최소한의 금액을 제외하고 정호 앞으로 꼬박꼬박 저금을 해 온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얼마 전 소식이 끊겼던 정호 엄마가 할아버지의 명의로 여러 대의 핸드폰을 발급받은 후 소액결제를 시도해 그 빚이 고스란히 할아버지 앞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정호를 위해 저축해 오던 통장을 해약하며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던 할아버지. 하지만 그렇다고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젠가 정호가 자립해야 할 시기를 대비해 다시 새 통장을 만든 할아버지는 전보다 더 열심히 폐지를 모으러 다닌다.
몸은 고되지만 손자 앞으로 한 푼 두 푼 쌓이는 통장 내역을 볼 때마다 기운이 나는 할아버지는 오늘도 정호를 위해 수레를 끌고 거리로 나선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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