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하이닉스 반도체.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광복절 연휴가 끝난 직후인 지난 16일 오전 유재한 한국정책금융공사 사장은 하이닉스 매각 과정에서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하이닉스 매각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추진하려 했으나 채권단의 구체적인 입찰 조건 논의 과정에서 결정되지 않은 사안 등이 보도되면서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죄송하다”는 것이 사퇴의 변이었다.
지난 11일 시중의 소문을 해소하겠다는 의지로 연 기자간담회에서 “제 직을 걸고 공정하게 하겠다”고 밝힌 지 불과 닷새 만에 유 사장은 사의를 내비쳤다. 한국정책금융공사 초대 사장으로서 내년 10월까지 임기를 1년 이상 남겨놓은 상태였다. 사실 올 초 현대건설 매각 과정부터 유 사장에 대해서 날 선 비판이 곳곳에서 제기됐다. 비판의 원인이었던 현대건설 매각 과정에서 보인 모호한 언행과 불분명한 입장, 잦은 말 바꾸기가 이번 하이닉스 매각 과정에서도 되풀이됐다는 것이 유 사장으로서는 치명적이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지난 18일 국회 정무위에 출석해 유 사장의 사표가 수리됐음을 밝혔다.
1955년 대구 출생인 유재한 사장은 경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1977년 행정고시에 합격, 공무원의 길을 걸었다. 대부분 공직생활을 재정경제부에서 했으며 2002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사무국장, 2007년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2008년에는 한나라당 정책실장을 맡으며 18대 총선에서 대구 달서 병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의 내년 총선 출마설이 나오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유 사장은 2009년 10월 산업은행이 산은금융지주와 한국정책금융공사로 분리되면서 정책금융 기능만 담당하는 국책금융기관인 정책금융공사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자산 28조 원, 자본 3조 원, 부채 25조 원으로 설립된 정책금융공사는 이로써 현대건설 하이닉스 등의 주요 주주가 됐다.
당시 정책금융공사의 출범을 두고 ‘제2의 산업은행’ ‘옥상옥’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산업은행과 업무경계가 모호했고 중소기업진흥공단, 신용보증기금, 수출입은행 등과도 업무가 중복될 우려가 컸다. 또 산은지주의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다. 유재한 사장은 취임 일성으로 “제2의 산업은행이라는 염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정책금융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유 사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날 뜻을 밝힌 셈이다.
▲ 지난 16일 사의를 표명한 유재한 전 정책금융공사 사장. 지난해 11월 당시 유 사장이 ‘현대건설 인수’ 관련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하이닉스는 이미 두 번의 매각 실패를 경험했다. 인수 자금만 수조 원에다 매년 수조 원을 투자해야 할 만큼 워낙 덩치가 크고 반도체 경기도 확신할 수 없다는 까닭에서다. 이에 하이닉스 채권단은 ‘채권단 보유 지분 15% 중 7.5% 이상과 전체 발행주식 10% 이내의 신주를 발행해 인수 기업에 매각한다’는 매각 공고를 냈다. 구주를 다 인수하지 않아도 되고 하이닉스의 자금으로 남을 신주 발행을 10%나 약속한 매력적인 기준이었다. ‘이번에는 기필코’라는 절박함이 배어 있는 공고였다.
SK텔레콤과 STX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다. 흥행 참패만 경험하던 채권단은 반색했다. 4대그룹 중 한 곳과 재계 10위권의 대기업이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박’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흥행에 성공한 채권단이 슬그머니 입장을 바꾸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채권단은 내내 “확정된 바 없다”고 밝혔으나 꽤 구체적인 정황까지 속속 드러났다. 소문의 뼈대는 구주를 더 많이 인수하는 기업에 가산점을 주겠다는 것.
인수 의향을 나타낸 기업들은 당초 약속과 공고와 다르다며 즉각 반발했다. SK의 경우 재검토하겠다는 얘기까지 서슴지 않았다. 유재한 사장은 ‘사실무근’임을 밝혔으나 실상 채권단 내에서 유 사장이 구주 매각에 더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상황이 악화돼갔다. 채권단 중 다수는 구주 매각보다 하이닉스 자체를 매각하는 데 더 무게를 둔 상태였다. 구주 매각에 앞장서는 유재한 사장과 정책금융공사를 반대해 소문을 일부러 흘렸다는 추측도 제기됐다.
급기야 유 사장은 ‘뜬소문’을 잠재우겠다며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다. 지난 11일 여의도 정책금융공사 본관에서 채권단의 입장을 밝혔다. 이 자리에서 유 사장은 “구주를 많이 산다고 해서 가산점을 줄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불리하도록 하지도 않겠다”며 “인수하는 구주의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전체 프리미엄이 얼마인지가 중요하다”고 해명했다. 즉 “구주에 대한 경영권 프리미엄을 더 주는 기업에 높은 점수를 줄 것”이라는 것이다.
유 사장의 발언은 뜬소문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사실’로 만들어버린 셈이 됐다. 유 사장의 발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재계 한 관계자는 “‘아’를 ‘어’라고 표현했을 뿐 결국 같은 말”이라며 “같은 말로 아니라고 주장하니 어이없을 뿐”이라고 비난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라며 “업계를 우롱하는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하이닉스 졸속 매각’을 지적해온 시민단체 투기자본감시센터도 12일 “경영권 프리미엄의 총액을 언급한 것은 채권단이 보유한 구주를 높은 가격에 사라는 말을 비비 꼬아서 표현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경영권 프리미엄 총액이란 ‘주당 시가를 초과한 금액×입찰 수량’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결국 구주를 더 비싸게, 많이 사는 쪽에 높은 점수를 주겠다는 것이다. 사달라고 애원하던 상황에서 사겠다는 거물이 둘이나 나타나자 경쟁해서 더 비싸게 사라는 것이다.
유 사장의 이 같은 언행과 행태는 올해 초 현대건설 매각 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지난해 5월 현대그룹이 외환은행 등 채권단에 재무구조개선 약정 압박을 받을 당시 유재한 사장은 “현대건설을 다음 달(6월) 시장에 매물로 내놓을 계획”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당시 대우건설 매각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현대건설 매각 작업을 시작하겠다는 의미였지만 현대그룹의 처지를 감안하면 오비이락이라는 시선을 받기에 충분했다.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어야 하는 현대그룹이 당장 현대건설을 인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유 사장이 다음달에 내놓을 계획이라던 현대건설 매각 공고는 지난해 9월에나 났다. 말이 너무 앞선 것이다.
유 사장은 현대건설 매각 과정에서 확실한 원칙 없이 모호한 말을 하고 상황에 따라 말을 바꿀 때도 있어 혼선을 초래하고 시장을 시끄럽게 했다. 현대건설 매각 과정에서 보인 유 사장의 좌충우돌식 언행과 모호한 말투가 하이닉스 매각 과정에서도 되풀이된 셈이다. 우선협상대상자가 교체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으니 어찌 보면 이번 하이닉스 매각 과정에서 보인 행태보다 지난 현대건설 매각 과정에서 보인 그것이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당시 유 사장이 현대건설 채권단을 대표하는 것처럼 행동한 것에 의문을 다는 사람도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현대건설의 최대주주는 외환은행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런데도 채권단 중 일원인 정책금융공사와 유재한 사장이 마치 채권단을 대표하는 것처럼 행동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되돌아봤다.
최대주주가 아님에도 정책금융공사와 유 사장이 현대건설 매각을 지휘한 까닭은 공적자금이 들어간 정부 지분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책금융공사와 우리은행의 지분을 합하면 정부 지분이 외환은행보다 많았다. 또 외환은행이 론스타라는 약점 때문에 선뜻 나서지 않은 것도 이유다. 외환은행이 나서 비싸게 팔려다보면 당연히 론스타의 ‘먹튀’ 논란이 다시 불거질 터였다.
유 사장은 하이닉스 매각 과정과 관련해 “의혹을 해소하지 못해 개인적인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며 억울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그의 말로 인해 안개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하이닉스 매각 관련 인사들은 더 억울하지 않을까 싶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