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여성 헤드헌터 1호 유순신 대표. 요즘엔 대기업에 소프트웨어 인력을 소개하느라 바쁘다고.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헤드헌터(Head Hunter), 직역하면 ‘머리 사냥꾼’. 조금은 끔찍하지만 원시 부족들이 상대 부족들의 머리를 잘라오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임원이나 전문 인력을 기업체에 소개해 주는 사람이나 업체(써치펌·Search Firm)를 뜻한다. 국내 여성 헤드헌터 1호로, 업계 수위의 유앤파트너즈(YOU&PARTNERS)를 이끌고 있는 유순신 대표(54)를 지난 8월 31일 만났다.
“우리는 고급 인재(임원급)를 기업에 추천하는 전문기관으로, 회사로부터 받는 수임료가 주 수익원입니다. 변호사와 비슷하죠. 개인한테는 안 받습니다. 써치, 즉 회사와 독점적으로 계약해 선수금을 받고 인재를 찾아주는 방식이죠. 단순히 기업과 회사를 연결시키는 게 아니라 클라이언트나 후보자와 상담하면서 역량에 대한 평가를 수행하는 등 커리어 컨설팅 회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유순신 대표와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제일 궁금했던 써치펌의 수익모델을 먼저 물었더니 돌아온 답변이다. 그렇다면 유앤파트너즈의 실적과 현재 업계 위치는 어떨까.
“직원은 40명가량, 매출은 오픈하기 어려워요. 업계의 룰이죠. 업계 1위라고 하고 싶지만 다들 매출 공개 안하니까, 최소한 5위 안에 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사실 매출보다 얼마나 중요한 프로젝트를 했느냐가 중요하죠. 공기업이나 금융기관 공모는 거의 저희가 했다고 보면 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공모가 어그러져 세 번째 저희가 들어가 꽤 어려운 프로젝트도 성사시켰습니다.”
1957년 서울 출생, 성신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한 유 대표의 첫 직업은 항공사 승무원(1978년)이었다. “1년간 맘껏 해외를 돌아다니다가 결혼하고 그만두겠다”는 얄팍한 생각을 가졌단다. 하지만 해외에서 전세계 여성들이 일하는 걸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결혼과 함께 3년여의 승무원생활을 접은 그는 1982년 프랑스계 원자력회사를 거쳐 1989년 미국계 화학회사에 입사했다. 여기서부터 헤드헌팅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미국인 사장이 최고의 사람을 뽑기 위해서는 신문 구인광고로는 안 된다, 써치펌 회사를 찾아보라더군요. 미국에선 그렇게 한다고. 그래서 이제 막 시작한 써치펌을 찾아냈죠. 다행히 사람 추천이 잘 됐어요. 그 뒤로도 어려운 지방 임원 뽑기까지 다 잘 돼 좋은 관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제가 영업하던 제품이 수입금지품목으로 묶이면서 회사를 그만두게 됐고, 애까지 딸린 유부녀를 뽑아주는 곳이 없어 그 써치펌 회사 사장과 상담을 했더니 그리로 오라고 해요.”
유 대표는 새 회사에 출근해보고 깜짝 놀랐다. 국내 가장 비싼 곳 중 하나인 사무실에서 매달 적자를 내고 있었던 것. 그가 계산해 보니 1년 안에 문을 닫을 듯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미국 회사에 있을 때 차 몰고 수도권 공단에서 박대당하며 설명하고 일 따오고, 하루 8군데는 돌아다녔거든요. 한데 사람 찾아달라는 요청이 8군데나 들어와 있는데 사무실에 앉아서 그걸 못 찾아? 저한테는 땅 짚고 헤엄치는 일 같았죠. 첫 달부터 매달 100%씩 성과를 냈어요. 아마 전 직장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했으면 그렇게 못했겠죠. 회사는 곧 브레이크이븐(Breakeven, 수지의 균형이 잡힌 상태)을 맞췄죠.”
이후 승승장구.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다국적회사가 어마어마하게 들어왔는데 그 회사들의 일을 도맡으며 업계를 제패했다. “일감이 너무 많아 일을 못할 정도”였다고. 여세를 몰아 2001년 그는 대표이사에 올랐다가 2003년 대주주와의 견해차이로 회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이젠 안락한 제2의 인생을 살려고 했다. 그러나….
“실적이 안 좋아서 잘렸다는 둥 뒷말이 들리더군요. 발끈했죠. 그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어요. 세 명이 작은 사무실에서 좀 불쌍하게 시작했지만, 한 달 만에 회사 차렸습니다. 그리고 1년간 내실을 다지자며 숨죽이고 일했어요. 컴퓨터 시스템을 갖추고 해외 얼라이언스(연합체)와 연결하고 좋은 사람 찾고. 그렇게 진용을 갖추고 시작했죠. 제가 가진 노하우와 좋은 사람, 좋은 시스템, 좋은 환경이 어우러지니 날개 단 듯 잘나갔죠.”
전문경영인에서 오너 경영인으로 변신, 질주를 계속하던 그에게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규모가 커져 더 비싸고 좋은 이곳으로 사무실을 늘려 인테리어까지 마치고 얼마 안 됐을 때예요. 옆 사무실이 캘로그였는데 보름 만에 철수했죠. 주요 클라이언트인 외국계 회사들은 순식간에 돌아가고, 대기업은 사람 찾겠습니까. 임대료는 수천만 원씩 나가는데 할 일은 없고 암담했죠.”
그는 10년여 전 IMF 외환위기에서 위기의 해법을 찾았다.
“IMF 땐 정말 거지가 된 느낌이었지만 이겨냈잖아요. 저 자신과 직원들에게 오래 가지 않을 거다,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자기계발을 하라고 주문했죠. 죽은 클라이언트 한 군데라도 더 찾아보고 인맥관리하고. 당장에 얼마 안 된다 해도 기죽지 말고 기회라고 생각하자고 말이죠. 그때 저도 퇴직한 분들을 사회로 연결하고, 사람에 대한 역량 리더십 평가 코칭 쪽 비즈니스를 생각해냈어요. 시간이 있으니까 가능했던 거죠. 이후 오히려 단단해졌어요.”
가뜩이나 바쁜 유순신 대표는 최근 더 바빠졌다. ‘소프트웨어 대란’으로 대기업들이 다급하게 외부 소프트웨어 인력을 요청해오기 때문이다. 추락하는 ‘IT 코리아’에 날개를 달아줄 인재 찾기, 그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