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일 현정은 현대 회장의 장녀 정지이 현대유앤아이 전무 결혼식에 참석한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왼쪽)과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참석 여부에 관심이 모아졌던 정몽구 현재차 회장은 불참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현대상선이 발주처를 바꾼 까닭은 현대중공업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 23.66% 때문인 것으로 풀이됐다. 현대상선이 현대그룹 경영권의 향배를 결정짓는 회사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따라서 현정은 회장이 현대상선 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는 이상 그룹 경영권은 늘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 3월 현대상선은 주주총회에서 현대중공업에 가로막혀 정관변경안을 뜻대로 처리하지 못한 사례가 있다.
이 때문에 현대그룹 측은 현대중공업 측에 현대상선 지분 매각을 몇 차례 요청했지만 현대중공업 측이 계속 거절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건설을 시아주버니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에 뺏기고 시동생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마저 요지부동이자 현정은 회장은 ‘대우조선에 발주’라는 특유의 승부수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옵션’이 숨어 있었다. 대우조선이 현대상선 지분 2% 혹은 1000억 원 상당의 주식을 매입하고 현대그룹의 우호세력이 되겠다는 것. 대우조선이 지분 매입에 쓰는 비용은 현대상선의 발주 가격에서 치를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우호세력까지 포함한 현대상선에 대한 현대그룹의 지분율은 39.6%에서 41.6%로 늘어난다.
일각에서는 대우조선이 의결권마저 현대그룹에 위임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해 계약 기간이 끝나는 3년 뒤 현대상선 지분을 현대그룹의 지주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에 매각하거나 현대엘리베이터가 지명하는 제3자에게 매각하는 옵션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그렇게 알고 있다”면서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계약기간이 3년이나 되기 때문에 3년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지 아직 지분을 취득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은 지난 8월 29일 기자회견을 통해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더 많은 수주가 이뤄진다면 우리도 파트너가 다른 쪽으로 안 가게 그 파트너한테도 컨트리뷰션(기여)을 해야 될 거 아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이를테면 사업 파트너로서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윈-윈’ 전략이라는 얘기다.
남 사장은 지분을 추가 매입할 의사도 내비쳤다. 단, 수주가 더 많이 이뤄질 경우다. 대우조선은 2008년 7월에도 경영권을 위협받던 대한해운의 백기사로 나선 적이 있다. 남 사장은 이번 결정을 그때와 마찬가지 의미로 받아들여달라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3일 오후 6시,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34)가 서울 신라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외국계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신 아무개 씨(37). 현 회장과 사돈을 맺은 이는 일본문화 전문가로도 유명한 신혜경 서강대 일본학과 교수다. 두 집안 모두 바깥사돈은 고인이 됐다.
지난 8월 30일 현대그룹은 “현대차그룹을 상대로 제기했던 500억 원의 명예훼손 민사소송을 취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재계에서는 대우조선이 백기사로 나선 덕에 경영권 안정을 꾀하는 데 한결 수월해진 데다 장녀의 결혼이라는 경사를 앞두고 현정은 회장이 가족 간 화해 제스처를 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현대그룹과 현정은 회장을 오랜만에 웃게 했다. 그동안 경영권 방어, 실적 부진, 대북사업 재개 불투명, 현대건설 우선협상대상자 교체, 주거래은행과 신경전 등에 시달리며 현대그룹에는 볕들 날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맞이한 겹경사는 현정은 회장이 기분을 내는 데 큰 영향을 준 듯하다.
하지만 일부 재계 관계자들은 “현정은 회장이 아직 마음을 놓아서도 안 되고, 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많은 부분이 명쾌하게 해결된 것이 아닌 데다 특히 경영권과 관련해서는 아직 불안 요인이 많다는 얘기다.
우선 백기사로 나서겠다는 대우조선이 현대상선 지분을 취득하는 기간은 3년이다. 3년이라는 시간은 수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시간이다. 남상태 사장이 지분 추가 취득을 시사하기는 했지만 이는 현대상선이 대우조선에 계속 발주해야 가능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또 대우조선은 공적자금이 투입된 매각 대상 기업이다. 비록 지난 2008년 한화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까지 정하고도 매각에 실패했지만 또 다시 매물로 나와야 한다. 이때까지 대우조선이 얼마나 취득할지 모르지만 현대상선 지분이 말썽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현대그룹이 아예 대우조선을 인수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한 지분 경쟁 소문도 시장을 점점 달구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의 1대주주는 현대그룹이며 2대주주는 독일 쉰들러그룹이다. 그런데 최근 현대그룹과 쉰들러그룹 간 갈등이 야기되면서 쉰들러그룹이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을 점차 확대해나가고 있다. 물론 우호세력을 포함해 현대그룹 측 지분이 절반을 넘어 당장 경영권 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쉰들러그룹이 계속 지분을 늘려가고 현대그룹의 우호세력으로 여겼던 주주들의 이탈이 발생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크고 작은 문제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 좋지 않다. 겹경사 이후 현정은 회장의 행보가 더 주목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