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
각자 비용을 내는 더치페이 문화는 사실 여성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이전부터 일상적이었다. 남성 직장인들이 ‘쏘는’ 문화에 익숙해 있을 때도 여성 직장인들은 더치페이가 일종의 예의로 통하곤 했다. 금융서비스 회사에 근무하는 P 씨(27·여)도 모든 식사비용은 처음부터 각자 해결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는 이런 분위기가 여러모로 훨씬 좋고 마음도 편하다.
“점심을 먹고 일어날 때가 되면 각자 신용카드를 들고 계산대로 갑니다. 음식점 사장님도 익숙한지 같은 테이블에서 각자 계산을 해도 이렇다 할 불평이 없어요. 좀 귀찮지만 이 정도 서비스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각자 비용을 내니까 편한 점이 참 많아요. 예전 회사에서는 눈치도 좀 봤고, 어떻게 얼마를 내야 할지 모르니 밥 먹으러 가기 전에 항상 현금을 준비했었거든요. 제가 먹고 싶은 메뉴를 마음껏 주문할 수 있어 좋아요. 상사가 내는 거면 아무래도 일부러 제일 싼 걸 먹어야 할 때가 많죠. 식사 후 커피도 각자 계산합니다. 되도록 금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요.”
더치페이 문화가 익숙하지 않던 이도 한번 그 편리함을 맛보고 나면 열렬한 지지자가 된다. 홍보회사에 다니는 M 씨(32)는 이런 더치페이 문화가 고마웠던 적이 있다. 이 문화 덕분에 속으로 진땀나게 머리 굴리는 일이 줄어 적극 찬성하는 편이다.
“누구 한 사람이 내면 다른 사람이 다음에 낸다는 분위기가 익숙한 편이었습니다. 지금 회사에서 처음으로 후배를 받았는데 동기 한 명과 같이 후배들을 대동하고 식사를 하게 됐습니다. 어느 식당으로 가야 ‘출혈’이 적당할지 머뭇거리는 순간 후배들이 비싼 집으로 우르르 들어가더군요. 먹는 내내 동기랑 같이 계산을 해야 하나, 내가 다 내야 하나, 이런 논의를 동기랑 어느 타이밍에 해야 하나 계속 생각하며 밥을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식사를 다 마치고 일어날 때가 됐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배들이 각자 먹은 식사비용을 주더라고요. 예의상 괜찮다고 이야기했는데도 당연한 것처럼 주는 후배들이 속으로 무척 고마웠습니다.”
이렇게 편리한 더치페이지만 가끔은 씁쓸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너무 철저한 더치페이가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리서치 회사에 근무하는 J 씨(여·29)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여자 선배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매사에 분명한 건 좋은데 다소 지나치단다.
“더치페이 문화 환영합니다. 이제는 뭐 고민할 것도 없는 일상적인 일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같은 부서에 있는 선배는 너무 철저하게 해서 탈이죠. 밥을 먹거나 간단하게 퇴근 후 맥주 한잔이라도 하면 계산할 때마다 원 단위까지 철저하게 나눕니다. 얼마 전에는 다들 현금이 없다기에 제가 카드로 냈는데요, 끝자리까지 계산해서 딱 8755원을 입금했더라고요. 좀 정 없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어요. 저보다 월급도 훨씬 많기도 하지만 저라면 그냥 1만 원 줬을 것 같거든요. 9000원만 줬어도 그냥 그런가보다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선배는 항상 지나치다는 느낌에 그리 편하지가 않네요.”
무역회사에 다니는 H 씨(여·30)도 비슷한 동료 직원이 있다고 말했다.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보다는 팍팍한 이미지를 준다고.
“간만에 야근 없이 일찍 끝마치게 된 날이라 동료들과 기분 좋게 술 한잔하러 간 날이었어요. 자리도 좋았고, 한참 웃고 떠들다 일어나게 됐죠. 비용을 나눠서 냈는데 제가 현금이 충분치 않아서 그 동료한테 빌렸습니다. 그런데 원 단위까지 정확하게 계산해서 나누더니 다음날 꼭 달라고 못을 박더라고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메신저로 돈을 달라고 하는데 원래 줘야 하는 거지만 마음이 그리 좋지는 않았어요. 어떻든 정확히 계산해서 줬습니다만 그 일 후로는 그 동료가 끼는 술자리는 잘 안 가게 돼요.”
더치페이 문화를 악용하는 얌체족들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자신의 몫을 정당하게 지불하기보다는 갹출하는 분위기에 ‘무임승차’를 하는 경우다. 전자 회사에 근무하는 L 씨(31)는 밥 먹을 때마다 눈엣가시 같은 선배가 하나 있다고 이야기했다.
“보통 식당에 가면 시간 줄이려고 같은 메뉴를 여럿이 시키잖아요. 예를 들어 부대찌개 같은 경우는 몇 인분이 한꺼번에 한 냄비에 나오죠. 그럴 때도 보통은 각자 1인분 가격을 내는데 그 선배는 딱 공기밥 값만 내고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이 시킨 찌개에 숟가락 얹었으면서 자기는 공기밥만 시켜서 먹었다는 거죠. 처음에는 눈감고 넘어갔는데 찌개 종류를 시킬 때마다 그러니까 굉장히 얄밉습니다. 그 선배는 더치페이에 대한 개념을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물류회사에서 일하는 S 씨(28)도 볼 때마다 얄미운 직원이 있단다. 한번 얌체 짓을 눈치 채고 나니 매사에 그 직원이 하는 행동을 관찰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고.
“일하다 출출해지면 조금씩 걷어서 먹을 걸 사오곤 하잖아요. 식사를 해도 그렇고 술자리를 가져도 그렇고. 그럴 때마다 항상 그 직원이 회계를 자청해서 이제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 직원한테 얼마씩 내면 되느냐고 묻곤 합니다. 한번은 할당된 금액을 낸 후 우연히 영수증을 봤는데 자기 몫은 쏙 빼고 계산을 해서 비용을 나눴더라고요. 그 뒤로 자세히 보니까 남들이 1000원을 낼 때 본인은 100~200원 덜 내는 식이거나 나눠 내는 사람이 많으면 본인 몫을 빼거나 그런 방식이었어요. 가서 따지는 것도 우스운 것 같고 곱지 않은 시선만 보내고 있습니다.”
한턱내는 기분도 가끔이다. 매번 비용 부담으로 좋은 자리마저 꺼리게 되는 불상사는 피하는 게 좋다.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직장 내에 각자 분담하는 분위기가 완전히 정착되면 좋은 점이 더 많을 듯하다. 우선 온전히 식사에 집중하며 즐겁게 음식을 먹는 상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