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 곳곳에 정전사태가 벌어진 지난 15일 오후 서울 중구 오장동 사거리에 신호등이 꺼져 있다. 연합뉴스 |
이번 사태의 시초는 전력 사용량의 폭주였다. 9월 15일 오전만 해도 예비전력은 600만㎾로 넉넉했지만 오후 2시 이후 최대 전력수요로 예상했던 6400만㎾를 320만㎾ 이상 초과하면서 불안한 조짐이 보였다. 오후 3시 무렵 상황이 심각해지자 전력거래소는 예고없이 순환정전을 실시했고, 전국 곳곳에서 정전사태가 속출했다. 약 5시간 동안 벌어진 동시다발적 정전사태에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전력거래소 염명천 이사장은 “예측하지 못한 이상 고온으로 전력수요가 갑자기 증가한 것이 원인”이라고 밝혔다. 즉 전력수요 예측을 예년에 맞춰 안이하게 하는 바람에 공급능력을 갖추고도 대규모 정전사태가 초래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부의 안이한 대응에 대한 비난이 거세게 일고 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고가 수차례 있었고, 해마다 예측불가한 무더위와 혹한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수요예측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해에도 예년처럼 8월 중순에 전력피크가 온다고 보고 여기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화를 자초했다.
사태는 순환정전 실시로 더욱 커졌다. 예고도 없이 이뤄진 기습정전에 전국 곳곳에서 사고와 피해가 속출했다. 엘리베이터 등 폐쇄된 공간은 물론이고 병원과 공장 등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직결되어 있는 곳에 있던 사람들도 속수무책이었다.
▲ 서울의 모 은행 ATM센터를 찾은 시민이 ‘정전안내문’을 살펴본 뒤 ATM 기계를 들여다 보고 있다. 연합뉴스 |
지난 9월 7일 ‘올 여름 전력난이 없었던 이유’라는 제목으로 의기양양하게 보도자료를 돌렸던 정부는 얼굴을 들 수 없게 됐다.
전력거래소가 사전에 마련된 정부의 매뉴얼대로 하지 않고 자체 판단으로 순환 정전조치를 취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과잉대응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순환정전 조치가 실시된 오후 3시의 예비 전력은 148만 9000㎾대였다. 하지만 정부의 대응 매뉴얼에는 ‘선 조치 후 보고’의 경우 예비전력이 100만㎾ 미만인 심각 단계에서만 가능한 조치로 적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가장 충격적인 것은 대한민국의 전력체계가 너무도 어이없이 무너졌다는 점이다. 국가적인 망신이 따로 없다. 명색이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비난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전력수급 조절에 실패한 정부의 책임론도 확산되고 있다. 정치권은 수요예측 실패와 대응 매뉴얼 작동 실패, 전력공급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 등의 책임을 물어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 염명천 전력거래소 이사장, 김우겸 한국전력 사장대행 등 관련 책임자들을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
전국적인 정전대란이 벌어진 9월 15일 저녁, 이명박 대통령이 주관한 만찬에 참석 중이었던 최중경 장관은 서면으로 대국민 사과성명을 냈다. 최 장관은 이어 지난 18일 오후 3시 기자회견을 열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태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번 사태를 ‘컨트롤타워 없는 MB정부 국정 난맥의 축소판’으로 규정한 민주당은 “한전과 주무부처인 지경부 장관은 국가를 비상사태로 몰아간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한다. 지경부에 대한 일대개혁이 불가피하다. 국정감사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소재를 분명히 따지겠다”고 벼르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현재와 같은 전력공급 시스템을 유지하고 안이한 태도로 방관한다면 이러한 사태가 언제든 다시 야기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전력비상 사태에 대비한 구체적인 대책조차 없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9월 기온이 이렇게 높게 나타난 것이 104년 만이라고는 하지만 전국을 암흑천지로 만든 초유의 정전대란 후유증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