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8월 11일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를 주재하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작은 사진은 ‘그린북’으로 불리는 <최근 경제동향>. 연합뉴스 |
‘그린북’은 지난 2005년 3월 4일 처음 발행됐으며 민간소비 설비투자 건설투자 수출입 등 지출부문과 산업생산 서비스업 활동 등 생산부문, 고용과 금융 국제수지 물가 부동산 등 총 12개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껏 그린북은 새로운 정보에 목마른 기자들에게도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린북에 담겨진 수치들은 대부분 과거에 나온 내용들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첫 페이지에 실리는 종합평가 분야의 어감 변화 정도만 기사화해왔을 뿐이다. 이러한 기사들도 지면에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시장에서도 그린북은 그동안 나온 통계청 자료를 모아놓은 책 정도로 취급해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린북이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의 기준금리를 족집게처럼 맞힌다’는 소문이 나면서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아예 일부 채권 전문가들은 그린북을 보고 기준금리 전망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특히 그린북이 나오는 시점이 한은 금통위가 열리기 하루이틀 전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실제 지난해 그린북에 ‘안정적인 거시정책’이라는 말이 나오면 금리가 인상됐다. 올해는 ‘인플레 기대심리’라는 말이 들어가면 기준금리가 인상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1~6월까지 나온 그린북에는 모두 ‘확장적 거시정책 기조 유지’라는 말이 들어있었다. 이는 결국 시장에 많은 돈이 돌도록 한다는 의미다.
재정부가 이러한 경제정책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우연인지 필연인지 금통위는 1~6월까지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금통위가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시중은행의 대출금리가 올라가면서 통화량이 줄어들게 된다. 반면 기준금리를 인하하면 통화량이 늘어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국 중앙은행들은 경기회복을 위해 통화량을 늘리기로 하고 기준금리를 낮춘 상태다. 7월 나온 그린북의 표현은 6월과 비교해 미묘하게 바뀌었다. ‘확장적 거시정책 기조’라는 말 대신 ‘안정적인 성장이 지속될 수 있도록 거시정책을 운용’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재정부가 성장 속도를 조율하겠다는 뜻을 비치자 그 달 금통위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다. 이 같은 일은 11월에도 반복됐다.
올해 들어서는 그린북과 금통위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단어가 ‘성장’에서 ‘물가’로 바뀌었다. 올 1월부터 소비자물가가 4%대를 넘어서는 등 물가가 고공행진을 거듭하자 성장보다는 물가에 방점이 찍힌 것이다. 1월에 나온 그린북에는 ‘원자재 가격 상승 및 일부 생필품 가격 인상 등이 인플레 기대심리로 이어지지 않도록 서민물가 불안 요인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대응’이라는 말이 들어갔다.
여기서 주목받은 부분은 ‘인플레 심리’와 ‘대응’이라는 말이다. 재정부가 시장에서 향후 물가가 더욱 오를 것이라는 기대 심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지적이 나온 때문인지 1월에 열린 금통위에서는 기준금리를 올렸다.
2월에는 인플레 심리라는 말이 그린북에 들어가지 않았고 기준금리는 동결됐다. 그런데 3월에 다시 ‘인플레 심리가 확산되지 않도록 1·13 물가안정 종합대책의 추진 실적을 면밀히 점검하는 등 물가불안에 대한 대응을 강화’라며 다시 ‘인플레 심리’가 들어가자 3월 기준금리는 인상됐다. 이러한 현상은 그 후에도 반복됐다. 4월과 5월, 7월에는 기준금리가 동결된 반면 그린북에 ‘인플레 심리 차단 등 물가안정 기반을 강화’라는 말이 들어간 6월에는 기준금리가 인상된 것이다. 기준금리가 오르지 않은 4월에는 ‘인플레 기대심리’라는 단어가 들어갔지만 대응 수준이 ‘강화’보다 약한 ‘유의’로 표시됐고, 5월에는 인플레 심리라는 단어 자체가 빠졌다. 7월에도 인플레 기대심리라는 단어가 들어갔지만 대응 수준에 대한 톤이 약했고, 역시 예상대로 기준금리는 동결됐다.
문제는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금통위가 결정하는 기준금리와 재정부가 내놓는 그린북 표현의 밀접한 관계가 드러내면서 한은 통화정책 결정의 주목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금융통화위원 1인 공석 사태가 1년 5개월을 넘기고, 재정부 1차관의 금통위 열석발언권(列席發言權, 회의에 참석해 발언할 권리) 행사가 지속되면서 한은의 통화 정책 자체가 의심받고 있다.
지난 5월 채권시장에서는 대부분 기준금리 인상을 예상했다. 물가가 지나치게 오른 데다 가계부채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어서 기준금리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또 유럽 재정위기로 위기가 재발될 때를 대비해 미리 기준금리를 올려 통화량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이러한 판단에 무게를 실어줬다. 하지만 금통위는 기준금리를 동결했고 시장은 이러한 결정에 의구심을 표시했다. 재정부의 그린북이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시장이 그린북을 통해 기준금리 변동 여부를 판단하는 현상은 8월과 9월이 되면서 더욱 심해졌다. 8월 그린북에 ‘대외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라는 표현이 들어가자 당장 시장에서는 기준금리 동결을 점쳤다.
8월 소비자물가가 5.3%로 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9월 그린북에는 ‘세계 경제의 하방 위험과 국내외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되는 등 경제여건의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라며 물가보다는 성장에 우려를 나타내는 내용이 실렸다. 역시 시장에서는 9월 기준금리 동결을 내다보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부 증권사에서는 금통위의 기준금리 결정 전 ‘9월 그린북, 대외불안 강조…. 9월 금통위 동결될 듯’이라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8월과 9월 모두 기준금리는 예상대로 동결됐다.
이에 대해 재정부 고위관계자는 “재정부와 한은이 거시경제 상황이나 대응 방향 등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고 있다 보니 이러한 오해를 사고 있다”면서 “금통위에 재정부 차관이 참석해 열석발언권을 하고 있지만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재정부 차관도 그날 회의에 들어가서야 기준금리에 대한 감만 잡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서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