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영국왕 헨리 8세는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게 앤 공주와 재혼하기 위해 왕위계승법을 만들었다. 당시 대법관이었던 무어는 이에 대한 지지발언을 일체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의 ‘침묵’을 헨리 8세와 당시 집권층은 ‘반역’으로 간주했다. 법이 옳고 정의롭고 합법적이라고 말하지 않았기에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반역이다”라는 논리였다. 이런 글을 쓴 박원순 변호사가 이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다.
“주위의 분들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흙탕물에서 사는데 당신 혼자만 그렇게 살 것이냐며 압력을 넣었다. 지금까지 겉으로는 정치진입을 거절했지만 속으로는 죄의식으로 남아 있었다. 현 정부의 실정을 몸으로 피부로 느끼면서 어떻게 혼자만 지낼 수 있나 고민을 많이 했다. 서울시정의 정치화가 전시행정과 서울시 부채 증가 등을 가져왔다. 거창한 공약을 제시하기보다 정말 시민을 보듬어줄 수 있는 생활 시정을 펴겠다.”
정치 참여를 선언한 그의 변이자, 그가 하겠다는 새로운 정치의 내용이다. ‘자신이 무엇을 이루겠다’는 권력의지보다 ‘타인의 요청’에 떠밀려 나온 듯하다. 이런 논리는 안철수 원장과의 단일화 과정에서도 살짝 보였다. 자신의 출마소식이 알려지기 전에 안 원장의 출마 의지가 확실했다면, 당신이 출마를 포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자신은 ‘서울시장 되는 게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이미 나가겠다고 했고, 이것을 번복하면 ‘도리가 아니기에’ 하겠다는 논리였다.
“박 변호사는 다양한 아이디어도 있고 아름다운 가게 등 무에서 유를 창조해와, 그분의 능력은 우리 사회에서 증명이 됐다. 서울시장직을 정말 잘 수행하실 분이다.” 박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양보한 안철수 교수의 평이다. 맞는 말이다. 박 변호사는 인권변호사로서 참여연대, 아름다운 가게와 재단, 희망제작소 등의 다양한 시민사회 조직을 만들고, 사회에서 의미 있는 일을 했다. 분명 남다른 아이디어와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정치참여를 하면서, ‘본인의 뜻’보다는 ‘주위의 강력한 권유’, ‘시대적 소명’ 등과 같은 외부의 힘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시민사회운동가’와 ‘정치인’의 정체가 다르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부패하고 진흙탕이지만, 시민사회는 깨끗하고 투명하다?”
만일 박 변호사가 향후 국민의 신뢰와 기대에 부응하는 정치인이 되려면, 이런 믿음부터 바꾸어야 할 것이다. 정치권이나 시민사회나 모두 진흙탕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진흙탕이기 때문이다. 깨끗한 내가 진흙탕 정치권에 참여하여 깨끗하게 바꾸겠다고 주장하면, 이미 그는 헛소리를 남발하는 구태의연한 정치인이다. 현재 우리 모두가 오물을 덮어쓴 상태이기에, 정말 깨끗하게 잘 살고 싶다는 각오를 분명 보여주어야 한다. 깨끗한 자신이 더러워진다는 마음으로 정치권에 들어간다면, 우리 사회가 바뀔 가능성은 더욱 없기 때문이다.
박 변호사는 ‘남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이상주의자다. 그렇기에, 자신의 정치적 변신에 대해 고뇌한다. ‘남이 어떻게 보든 자신의 길을 가면서, 자신의 꿈에 충실한’ 안 원장과 다르다. 대중들은 시민운동가와 정치인을 잘 구분하지 않는다. 과거 DJ와 노무현 정권에서, 시민운동가의 정치참여는 대세가 되었다. 여의도나 군대, 대학, 언론사 등이 정치후보자 배출소라면, 시민운동집단도 정치후보자 양성소 수준이다. 이런 사회 변화, 대중의 인식을 모를까?
사진작가 조세현 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신발 뒷굽이 해진 박 변호사의 신발 사진을 올렸다. 소박하고 검소한 그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그렇기에, 대중은 그를 더 신뢰하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 10년도 더된 해진 잠바를 입고 나섰을 때 중국인민들이 감동하는 수준의 정치의식이다.
박 변호사의 정치의식과 심리가 잘 드러난 또 다른 상징물이 수염이다. 안철수 씨와의 단일화 장면에 드러난 그의 수염이다. 백두대간을 한 달 이상 종주하였기에, 깎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수염을 통해 자신의 고민과 고뇌 또는 진정성을 보여주려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조차 과거 전형적인 정치인 손학규 씨 행보의 답습이다. 손학규 씨는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 덥수룩한 수염으로 민심대장정의 정치행보를 했다. ‘변신의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 수염은 민망한 자기 가리개다. 수염의 이런 용도를 지하의 무어가 알면 통탄할 것이다.
자신의 정치참여 논리를 주위의 압력으로 돌리며, 스스로 깨끗하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바뀌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원칙을 분명하게 남들에게 알리고 공유하기 쉽지 않다. ‘스스로 정당하고, 옳고, 훌륭하다고 남들이 보아주면 괜찮은 사람’이 되지만 진흙탕에서 서로 그렇게 보기 힘들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소통에서 강점이 있다는 박 변호사가 정말로 자신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분명히 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감동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그가 밝혔듯이 그의 목표는 서울시장이 아니라 분명 다른 것인 것 같으니 말이다.
연세대 심리학 교수 황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