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 지식경제위원회는 지난 16일 정전사태에 대해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과 한전 관계자를 출석시켜 긴급현안 질의를 가졌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지난 9월 19일 정부 과천청사에서 열린 국회 지식경제위원회의 지식경제부 국정감사장에서는 갑작스레 고성이 터져 나왔다. 국정감사 전날 지경부는 15일 발생한 정전사태 당시 전력거래소가 전력공급능력을 과다계상했다고 밝혔다. 이날 국감에서 이러한 문제는 지경부가 국민에게 허위보고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지적이 나오자 최중경 지경부 장관이 발끈한 것이다. 사상 초유의 정전사태로 사실상 사퇴 의사를 밝힌 상황이었음에도 ‘최틀러’라는 별명답게 최 장관의 고집스럽고 울컥하는 성격에는 변함이 없었다.
재무부 관료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뒤 이번으로 3번째 불명예 퇴진을 앞두고 있는 최 장관으로서는 어찌 보면 울컥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동안의 퇴진은 자신의 경제적 소신과 현실과의 충돌에서 빚어졌지만 최 장관 입장에서 이번 불명예 퇴진은 산하기관의 허위, 늑장 보고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최 장관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공인회계사로 상일회계법인에서 일하다 1979년 행정고시 22회로 관가에 입문했다. 이후 재무부 사무관을 거쳐 재정경제부 금융협력과장, 외화자금과장, 증권제도과장, 국제금융국장을 지낸 정통 재무관료다.
최 장관은 직선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금융협력과장으로 IMF와 구제금융협상을 벌일 때 IMF 측 대표가 협상 막판 은행폐쇄안을 내놓자 “이건 사기야, 협상무효다”라고 외친 것은 최 장관의 성격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물불 안 가리는 성격답게 일에 대한 추진력 또한 대단하다. 2005년부터 세계은행 상임이사로 선출돼 일을 할 때 개발도상국 지원 방안과 관련해 뛰어난 의견을 많이 내놓아 폴 울포위츠 당시 총재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특히 1991년 재무부 국제금융국장과 사무관으로 인연을 맺은 강만수 산은그룹 지주회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최 장관을 ‘가장 헌신적인 공무원’이라고 했을 정도로 아꼈다.
강 회장은 지난 대선 직후인 2008년 1월 이명박 대통령에게 최 장관을 “일단 써보면 스타일이 마음에 들 것”이라며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적극 추천했다. 최 장관은 인수위 전문위원이 됐다는 강 회장의 전화를 받고서 그날로 서류와 옷가지만 싸든 채 한걸음에 귀국길에 올랐다.
강 회장의 호출을 받을 때 최 장관은 첫 번째 불명예 퇴진을 하고 세계은행으로 유배 아닌 유배를 떠난 상태였다. 최 장관은 재경부 국제금융국장이던 2003년 고환율 유지를 위해 역외환물시장에 개입했다가 1조 8000억여 원의 손실을 정부에 입히고 물러났다. 당시 예상을 넘는 개입에 외국 투기세력들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이후 최 장관에게는 최틀러라는 별명이 붙었다. 최 장관은 고환율로 수출경쟁력을 높여 성장을 이끌고 외환보유액을 쌓아 경제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강 회장도 똑같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같은 경제적 신념을 가진 강 회장과 최 장관은 이명박 정부 들어 새로 탄생한 기획재정부 장관과 1차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최 장관은 강 회장의 추천과 강력한 추진력 덕분에 이 대통령의 신뢰를 얻으면서 ‘공신’이 아님에도 현 정부 들어 잘나가는 관료 중 한 명이 됐다.
이 대통령의 신뢰는 최 장관이 지경부 장관으로 갈 때 야당이 최 장관의 투기 의혹을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했음에도 국회 청문회 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을 강행한 데서 잘 드러난다. 당시 이 대통령은 김영환 국회 지식경제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최 후보자가 부족한 데가 있으면 내가 채워서 일을 잘 해나겠다. 나를 믿고 (보고서를) 통과시켜달라”고 당부했을 정도다.
최 장관이 재정부 차관으로 근무할 때 강 회장과 더불어 ‘최강라인’으로 불렸다. 두 사람 간 호흡은 잘 맞았지만 이러한 생활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고환율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대리 경질 논란 속에 차관을 맡은 지 4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 필리핀 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두 번째 불명예 퇴진이었다.
그러나 최 장관은 1년여 만에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다시 부활했다. 최 장관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자신의 캐리커처를 새긴 새 명함을 만드는 등 직선적인 이미지를 순화시키는데 노력했다. 최 장관은 올 1월에 야당의 반대에도 지경부 장관을 맡아 과천청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지경부 장관을 맡은 뒤부터 오히려 최 장관의 행보는 더욱 강해졌다. 거기다 쏟아내는 발언들이 전 분야에 걸치면서 정치권은 물론 관가 재계 등에서도 적을 양산하고 말았다.
휘발유 값을 잡겠다며 원가를 따져보겠다고 큰소리를 쳤고, 정유회사들에게는 성의표시를 하라고 압박해 휘발유 가격 인하를 끄집어냈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과는 초과이익공유제를 놓고 날 선 대립을 보였다. 또 지경부 관할이 아님에도 “환율을 내려서 물가를 잡으려는 것은 순진무구한 짓”이라며 환율 문제에 개입하고, 유류세 인하를 언급하는 등 타 부처와도 삐걱거렸다. 기업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는 “납품단가를 후려쳐 단기성과를 높이고 성과금을 챙기려는 기업 관료는 해고해야 한다”는 말을 해 재계를 발칵 뒤집어 놨다.
국회 대정부질문 때 해외 출장을 이유로 두 차례나 빠졌다가 4월 12일에 혼자 국회에 출석하는 일도 벌어졌다. 장관 1인만이 출석해 대정부질문에 응한 것은 국회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최 장관은 당시 2시간 30분 동안 휴식 없이 답변석에 서서 여야 의원들의 질타를 받았다. 이처럼 사방에 적이 생긴 사태에서 정전사태가 벌어지자 청와대도 최중경 카드를 접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최 장관의 일에 대한 열정, 추진력, 애국심 등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재정부 차관과 경제수석 때만 해도 경제에 대한 확고한 소신이 돋보였다”면서 “그런데 지경부 장관을 맡으면서 너무 광폭 행보를 보이고 독선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독이 됐다. 여러 차례 낙마에도 최고 권력자의 신임으로 부활했다는 것이 최 장관을 오버하게 만든 것 아닌가 생각된다. 좌충우돌하면서 자신의 부처는 물론 정부 전체에 부담이 돼버렸다”고 평가했다.
김서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