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 |
“하루 종일 컴퓨터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맞지만 그 외의 것들은 거리가 있죠. 프로그래머에 대한 환상이 직장생활과 만나 무너지는 느낌이랄까요? 일단 야근이 많아서 개인 시간은 물론 동료들과 퇴근 이후 시간을 즐기는 것도 힘들어요. 집에 가면 자기 바쁘고 때로는 새벽에 퇴근하기도 하니 멋진 옷은 신경 쓰기도 어렵죠. 게다가 컴퓨터 모니터 앞에만 앉아 있으니까 뭐든지 편한 것만 찾게 돼요. 일이 좀 일찍 끝나도 만성적인 야근 습관으로 쉽사리 집에 가지 못 합니다. 깔끔하고 지적인 모습은커녕 늘 피곤에 절어있네요.”
인터넷 매체에 근무하는 P 씨(33)도 생업의 문제를 넘어 사회발전에 기여한다는 포부를 안고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정의의 사도가 되어 현장을 누빌 줄 알고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러나 막상 접한 현실은 단순한 직장인으로서의 삶에 더 가깝고 현장보다는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더 많단다.
“일단 시간에 항상 쫓기기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닐 여유가 없어요. 책상에 앉아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마감시간에 맞춰 부랴부랴 일을 끝내고 나면 기획거리를 찾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어야 하죠. 이 역시 시간 때문에 발목이 잡혀 대부분 책상에서 해결합니다. 대단한 결과물을 토해내겠다는 결심보다는 하루하루 무사히 마감시간을 지켜내는 게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지네요. 기획을 할 때는 광고주와의 관계도 생각해야 합니다. 정의의 사도보다는 잘리면 안 되는 직장인인 게 현실이거든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커리어 우먼’에 대한 환상이 생길 정도로 여성 직장인은 우아하고 멋지다. 외식브랜드 팀장으로 일하는 H 씨(여·35)도 그런 커리어 우먼을 꿈꿨다. 아침 운동을 하고 원두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출근하면 하루 종일 활력적으로 일을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퇴근 후에는 새로운 트렌드도 익힐 겸 전시회를 가고, 전망 좋은 카페에서 관련 잡지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꿈꿨다.
“막상 직장인이 돼서 어릴 때 가졌던 커리어 우먼에 대한 환상들을 돌이켜보니 그땐 정말 잘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일단 아침에는 너무 피곤해서 운동은 꿈도 못 꿉니다. 요새 커피 값 비싸서 매일 못 사먹고요. 일도 그래요. 팀장이 되면서 위아래로 치이니 스트레스가 높아졌어요. 활력은커녕 종일 컴퓨터와 씨름할 때가 더 많습니다. 퇴근 후에는 뭐라도 하고 싶은데 일단 시간이 늦어서 전시회도 힘들고, 병원을 한번 가려고 해도 야간 진료 할 때나 겨우 갑니다. 집에 가면 젖은 빨래처럼 축 처져있게 돼요.”
마케팅 회사에 근무하는 K 씨(여·30)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도통 의욕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꿈꾸던 것과 너무 다르단다.
“대학원에서 마케팅을 전공했어요. 취업하면 매니저로 브랜드 구축 프로젝트에서 능력을 발휘하면서 일할 줄 알았죠. 막상 직장생활을 해보니 그런 기회가 많지 않아요. 고객사들의 홈페이지 관리를 하게 되거나 간만에 온라인 마케팅 업무를 맡게 돼도 정작 하는 일은 블로그 관리에 지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기획안을 내도 무조건 최저비용으로 다시 맞춰오라는 상사의 지시 때문에 맥 빠질 때가 허다하고요. 전문직 여성으로 무게 있는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처리해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는데 현실은 너무 다르네요.”
직장인이 되면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을 많이 갖는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임금상승률은 정체되고 물가는 가파르게 오른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A 씨(여·29)도 직장인이 되면 독립해 세련된 원룸에서 싱글의 삶을 만끽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예상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집과 직장이 멀어서 회사 근처 작은 원룸에서 살고 있어요. 독립의 꿈은 이뤘지만 사는 건 예전에 가졌던 환상보다 훨씬 남루합니다. 월세가 너무 비싸서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기가 힘들더라고요. 자기계발을 위해 학원이라도 다니려고 하면 시간은 둘째 치고 비싼 학원비 때문에 엄두가 나질 않아요. 영화 같은 데 보면 친구들끼리 주말이나 연휴에 가까운 해외여행도 가잖아요. 저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정말 큰맘 먹지 않는 이상은 버겁죠.”
제약회사에 다니는 M 씨(31)는 직장인이 되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고 말했다. 학창 시절 직장인은 좀 더 합리적인 의사결정에 상호존중을 기본으로 한 관계형성이 가능할 줄 알았단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지금은 좀 나아지긴 했지만 신입 때는 진짜 혼란스러웠습니다. 별것 아닌 일로 불같이 화를 내거나 트집을 잡는 상사는 물론이고, 상하관계에 의한 복종만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때로 군대보다 더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고요. 그래도 학교 다닐 때나 군대에서는 일종의 정치는 필요 없었던 거 같은데 직장생활을 해보니 사내 정치도 신경 써야 하고 인맥관리 때문에 비굴해지는 선배들 보면서 씁쓸할 때도 있습니다.”
최근 한 취업포털에서 직장인 57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78.8%가 학창시절 직장인에 대한 환상을 가져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 이들 중 상당수가 그 환상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면이 많다고 응답했다. 환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라는 측면에서 보면 당연할 결과다. 다만 정신건강을 위해 환상은 빨리 깨고 현실에 적응하는 편이 좋을 듯싶다. 많은 직장인 선배들처럼.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