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이사님과 친해볼 요량으로 골프를 권유하면서 몇 번 같이 운동을 했어요. 이제는 골프에 재미를 붙여서 툭하면 저를 불러냅니다. 초반에는 운동도 할 겸 괜찮다 싶었는데 그게 거의 매주 반복되니 힘들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쉬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아이들 데리고 어디 놀러가고 싶은데 가족과 있겠다고 하면 알겠다고 하면서도 섭섭한 티를 내니까 전화를 안 받거나 거절하기도 어렵습니다. 친구들이 간만에 보면 귀농했냐고 그럽니다. 얼굴이 너무 새까매졌거든요. 이제는 이사님이 골프 예찬론자가 돼서 주말에 접대할 때도 골프장으로 갈 때가 많은데 그럴 때도 저만 대동합니다. 한참 어린 직원들도 있는데 제가 직접 가서 수발을 들어야 할 때는 골프를 권유한 게 정말 후회됩니다. 직장 생활하면 뭐든지 잘해야 좋을 줄 알았는데 업무 이외의 것들은 괜히 잘한다고 했다간 몸만 피곤해지는 것 같습니다.”
금융사에 근무하는 K 씨(여ㆍ29)도 주말에 습관적으로 연락해서 불러내는 여자 상사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처음에는 동생처럼 여기나 싶어서 고맙기도 했는데 이제는 심심한데 불러낼 사람은 없고 편하게 부리기 쉬워 연락하는 것 같다고.
“여자 상사분인데 서른 중반이고 싱글이에요. 아무래도 같은 여자니까 화장품이나 옷 같은 부분에서 공통 관심사가 생기더라고요. 한 번은 주말에 시간을 내서 같이 쇼핑을 갔어요. 제가 이것저것 꼼꼼히 제품 따지면서 설명도 하고 그랬죠.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즐거웠는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어요. 주말만 되면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혼자 보기 좀 그렇다고 하거나 친척 결혼식 때 입을 옷을 골라줬으면 좋겠다, 그 식당이 맛있다는데 같이 가보지 않겠냐 하면서 계속 불러내는 거예요. 이제는 주말이면 어김없습니다. 지금은 남자친구도 생겨서 데이트도 마음껏 하고 싶은데 토요일이면 휴대폰에 상사 번호가 뜨고 주말 하루가 날아갑니다. 데이트 약속이 있다면서 거절이라도 하면 여자들은 남자친구 생기면 의리고 뭐고 없다는 식의 말을 슬쩍 던집니다. 이러니 안 나갈 수도 없고 가끔 상사 하녀가 된 기분이 들어요.”
부하직원이라고 당할 수만은 없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앓아눕느니 나름의 방안을 만드는 게 낫다. 제조업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L 씨(여ㆍ28)는 상사 번호가 휴대폰에 뜨면 있는 최대한 시끄럽게 만든다. 집에서 쉬고 있다는 티를 내면 절대 안 된단다.
▲ 영화 <신데렐라 스토리>의 한 장면. |
무역회사에 다니는 Y 씨(30)는 꼭 휴일 연락해서 귀찮게 하고 심지어 불러내기까지 하는 상사에게 얼마 전 벗어났다. 부모님이 시골에 내려가면서다.
“일단 서울에 있으면 아무리 핑계를 대도 전화를 받아야 하고 때로는 회사에 나가야 합니다. 몇 달 전 부모님이 시골에 내려가시면서 상사의 연락에서 해방됐어요. 부모님이 작은 농장을 하게 되셨는데 초반에는 일손이 좀 필요했거든요. 주말만 되면 집에 내려갔고 무조건 전화를 꺼놨죠. 처음에는 뭐라고 하던 상사도 제가 손이 거칠어지고 얼굴이 까맣게 타서 오니까 별 말 없더라고요. 솔직히 지금은 농장도 정리가 됐고 일하는 분들도 따로 있어서 제가 굳이 내려갈 필요가 없어요. 이제는 상사한테 저는 주말이면 무조건 지방에 내려가는 걸로 인식돼 있어서 전화기를 켜놔도 전화가 안 오더라고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되도록 꺼둡니다.”
화학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H 씨(29)는 좀 더 대담한 방법으로 상사의 휴일 연락을 피하고 있다. 사생활과 직장생활을 완벽하게 분리하는 것이 그만의 방법이다.
“예전에 한 대의 전화기로 번호 두 개를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있었어요. 투넘버 서비스라고 하는데 그때 참 유용하게 잘 썼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공적인 경우와 사적인 경우를 구분해서 번호를 공개할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한 대의 전화기로 번호 두 개를 쓰는 게 아니라 실제로 휴대폰을 두 대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장님이 급하지도 않은 일로 퇴근 후나 주말 가리지 않고 연락하고 불러내니 어쩔 수 없더라고요. 똑같은 휴대폰을 두 대 마련해서 회사에는 공개용 번호를 알려주고 평소에 친구들이나 가족들과는 비공개용 번호로 연락합니다. 주말에 공개용 번호로 전화가 오면 무조건 안 받아요. 다음 날 회사에 가서도 똑같이 생긴 비공개용 휴대폰 보여주면서 무조건 전화 안 왔다고 하면 상사도 뭐라고 못하니까요. ‘투폰’ 체제로 가는 게 개인생활 보호도 되고 여러 모로 편리합니다.”
상사가 휴일에 연락했을 때 당당하려면 일단 휴일 전에 맡은 업무를 완벽하게 끝내는 것이 먼저다. 그래야 연락을 받지 않든 휴대폰을 꺼놓든 할 말이 있다. 그래도 상사의 연락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면 방법은 하나다. ‘나는 상사가 휴일에도 불러내고 싶은 믿음직한 부하직원’이라고 자기 암시를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이 노심초사하며 연락을 안 받는 것보다 정신건강에 좋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