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03년 2월 18일 예순 두 살의 전융남씨가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 잠시 후 맞은 편에 앉은 수상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한 손엔 약수통, 한 손엔 라이터를 든 남자였다.
전융남 씨가 탄 열차는 1079호. 열차가 중앙로역에 들어서던 그 순간 남자의 바지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융남은 외투를 벗고 다급히 불을 끄기 시작했다.
열차 안까지 번진 불은 삽시간에 옆 칸으로 또 옆 칸으로 옮겨붙고 있었다. 불길을 피해 승객들의 탈출이 시작되던 그때 어디선가 정체불명의 바람이 불어왔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안전문이 열리고 닫힐 때에는..."
불길이 번져가는 중앙로역 선로에 또 한 대의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1080호 열차였다. 불이 시작된 1079호와 뒤늦게 들어온 1080호. 그러나 대부분의 피해는 모두의 예상을 깬 1080호에서 발생했다.
어째서 1080호의 기관사는 불구덩이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일까. 그날, 사고로 딸을 잃은 아버지가 용기 내 카메라 앞에 섰다.
가족이 딸을 회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이의 흔적이 담긴 물건을 꺼내 보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하게 간직해온 수십 장의 낡은 테이프 속엔 너무나도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약수통과 라이터가 전동차 두 대를 불태우고 수백 명의 사상자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우리의 지하철(地下鐵)이 지화철(地火鐵)이 된 비극의 진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밝혀진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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