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보사 빅3인 교보생명, 삼성생명, 대한생명(왼쪽부터). 이들은 이자율 담합을 주도하고도 ‘리니언시 제도’를 이용해 과징금을 피하려는 꼼수를 보여 비난을 사고 있다. |
특히 한화그룹 계열사인 대한생명은 이례적으로 일간지에 사과문까지 게재해 과징금을 감면받기 위해 ‘알아서 긴다’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중소 생보업체들은 공정위 발표에 반발해 소송도 검토하고 있는 상황. 피해를 입은 소비자들도 집단소송을 진행하고 있어 한바탕 전쟁이 예고된 생보사 담합사건의 전말을 살펴봤다.
지난 10월 14일 공정거래위원회는 “생명보험시장에서 장기간에 걸쳐 관행적으로 이뤄졌던 개인보험 상품의 예정이율과 공시이율 담합행위를 적발했다”며 생보사 12곳에는 과징금을 부과하고 나머지 4개 업체에 대해서는 시정명령을 내렸다. 회사별로는 삼성 1578억, 교보 1342억, 대한 486억, 알리안츠 66억, 흥국 43억, 신한 33억, 동양 24억, AIA 23억, 미래에셋 21억, ING 17억, 메트라이프 11억 KDB생명 9억 원 등이다. 동부, 우리아비바, 녹십자, 푸르덴셜생명은 시정명령만 받았다.
공정위에 따르면 16개의 생보사들은 지난 2001년부터 2006년까지 공시이율과 예정이율을 자체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상호 합의하에 공동으로 결정했다. 삼성, 대한, 교보생명 등 대형 업체 상품부서장회의를 통해 먼저 이율을 합의한 후 다른 생보사에 전파하는 방식이었다는 것. 공정위 관계자는 “사업자들은 담합을 통해 경쟁 상태에서의 이율보다 낮은 수준으로 이율을 결정해 고객이탈을 방지하고 안정적인 손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며 “담합으로 인해 이율이 낮아져 소비자들만 보험 혜택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공정위의 발표가 나자 생보업계는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담합을 인정할 수 없다’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대한생명은 즉각 담합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 눈길을 끌었다.
대한생명은 지난 10월 18일자 일간지를 통해 사과문을 게재했다. “고객과 소비자를 보호하고, 공정경쟁 질서를 확립하는 데 앞장서야 할 생명보험회사로서 공정위로부터 담합 행위와 관련 시정 명령을 받았다”며 “한화그룹의 정신인 신용과 의리, 핵심 가치인 도전·정신·헌신 정도에 반하는 것으로 업계 관행이라는 명분하에 업무 처리에 매진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아직 공정위의 최종 의결서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사과문을 게재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 그 배경에 대해 여러 말들이 오갔다. 중소업체 관계자들은 “얄미워 죽겠다. 과징금을 감면받기 위한 행동으로밖에 안 보인다”고 입을 모았다. 이에 대해 대한생명은 “절대 과징금 감면 혜택을 받기 위해 사과문을 게재한 것은 아니다. 아직 최종 의결서가 도착하진 않았지만 그 전에 고객들에게 심려를 끼친 점을 사죄하고자 한 것이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부에서 제기된 ‘김승연 회장 지시’ 설에 대해서도 “임원들 선에서 결정된 것이지 회장님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대한생명뿐만 아니라 교보, 삼성도 중소업체와 소비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리니언시 제도의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리니언시는 불공정행위에 대한 조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제일 먼저 자진 신고한 업체의 과징금은 전액 면제, 2순위로 신고한 업체는 50%를 감면해준다. 업계에 따르면 교보생명이 제일 먼저 담합을 자진 신고해 과징금 1342억 원을 전액 면제받고, 삼성생명이 2순위로 신고해 50%를 감면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2순위를 차지하기 위해 삼성생명과 대한생명 간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는 소문까지 흘러나온다.
이에 대해 삼성생명 측은 “우리가 얼마의 금액을 감면받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자진신고를 한 것은 맞지만 우리가 주도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없다. 최종 의결서가 나올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교보생명 관계자도 “공정위의 의결서를 보고 입장을 정리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형업체들의 ‘발 빠른 자백’에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중소형업체들도 “이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일부 업체는 담합을 인정하지 않고 소송을 검토하고 있는 곳도 있다. 한 중소업체 측은 “의결서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우리는 담합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법무법인을 통해 소송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른 중소업체 관계자 역시 “단독으로 소송을 진행할 수도 있고 타 중소업체들과 함께 할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자들도 집단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예정이율과 공시이율 조작은 보험료·보험금과 직결되기 때문에 피해액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예정이율과 공시이율은 보험 가입자에게 장래 보험금으로 지급하기 위한 적립금에 적용되는 이자율이다. 예정이율은 확정형으로, 보험료 납입부터 지급시점까지의 시간 동안 보험사가 보험료를 운용해 기대되는 수익을 예측, 일정한 비율로 미리 보험료를 할인해주는 할인율을 말한다.
공시이율은 변동금리형 상품의 준비금에 적용하는 이율로, 보험개발원에서 매월 공시이율을 발표하는데 이에 따라 이율이 변동한다. 은행 금리에 빗대보면 예정이율은 고정금리, 공시이율은 변동금리에 해당한다.
이처럼 예정이율과 공시이율에 따라 보험료나 보험금이 달라지며 소비자들은 각 보험사의 이율을 비교,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예정이율이 높으면 보험료는 상대적으로 싸고, 낮으면 보험료는 비싸진다. 공시이율은 높을수록 더 높은 이율로 준비금이 적립돼 소비자가 받는 보험금이 커진다.
금융소비자연맹 조연행 부회장은 “생보사들이 보험소비자들에게 보험료를 더 내게 하거나 만기금을 덜 주기 위해서 담합한 것이 확인된 만큼 이는 엄연한 불법행위에 해당된다”면서 “생보사를 대상으로 소비자 피해에 대한 부당이득반환청구소 제기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생보사들이 담합한 6년간 보험소비자들이 직접적으로 입은 피해액만 해도 최소 17조 45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대 30조 원이 넘을 수도 있다는 전망도 있다. 현재 피해자를 모집해 원고단을 결성 중이며 빠른 시일 내에 소송을 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소송 참여 대상자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16개 생보사에 연금보험, 종신보험, 건강보험 등 확정이율형 상품과 변동금리인 금리연동형 저축보험이나 연금보험에 가입한 보험소비자라면 가능하다고 한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