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투자협회장 선거전은 지난 10월 25일 증권노조(전국사무금융노조 산하 증권본부)가 황건호 회장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황 회장은 증권업협회장을 포함해 무려 8년째 회장을 맡고 있는데, 최근 업계와 잇단 갈등이 불거지며 노조의 퇴진요구까지 나오게 됐다.
빌미는 최근 검찰이 주가연계워런트(ELW) 초단타매매자(Scalper)에 대한 부당한 혜택을 문제 삼아 12개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를 무더기로 기소한 데서 비롯됐다. 증권사들은 전 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관행인 데다 뚜렷한 법적 처벌기준이 없는 사안에 대해 검찰의 무더기 기소가 이뤄진 이후 금융투자협회장으로서 업계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는 불만이 터뜨려왔다.
업계 관계자는 “증권사 실무자들이나 사장단 모임에서 ELW 기소와 관련해 협회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던 차에 증권노조가 공개적으로 황 회장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내년 2월로 예정된 금융투자협회장 선거전에 불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이는 유력한 차기 금융투자협회장 후보인 황성호 우리투자증권 사장이 ELW 기소자 명단에 포함된 데서 단초를 읽을 수 있다. 내년 초 임기가 끝나는 황성호 사장은 연임하거나 우리금융그룹 내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게 여의치 않을 경우 협회장에 출마한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협회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나, 다른 금융회사 요직을 맡기 위해서는 ELW 소송이 무난히 끝나야 한다. 실형을 받을 경우 금융회사 임원으로의 취업이 제한될 수 있다. 황 사장으로서는 ELW 소송과 관련해 황 회장에게 가장 서운한 사람들 중 하나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황건호 회장이 내년 연임에 대한 뜻을 공공연히 내비친 가운데 무려 12명의 증권사 최고경영자들이 무더기 소송을 당한 것은 미묘한 변수가 된다. 내년 임기가 만료되는 대형 증권사 사장이 다수 포함됐는데, 이들은 협회장 잠재 후보가 될 만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ELW 소송 결과 실형이 선고될 경우 황 회장으로서는 경쟁자가 없어지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황건호 회장 주변에서는 이 같은 분석에 펄쩍 뛴다. 협회 관계자는 “ELW 소송 관련, 협회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업계 입장을 대변하려 애써왔다. 법적 잣대가 적용되는 사안인 만큼 내놓고 대응을 하지는 못하지만 간접적으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번 소송의 억울함을 호소하려 최선을 다했다”고 항변했다.
이처럼 ELW 소송이 계기는 됐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증권업협회장을 포함해 무려 8년간 ‘장기집권’에 따른 ‘반 황건호 기류’가 자연스레 형성됐다는 점이다. 특히 증권, 자산운용, 선물협회가 통합된 금융투자협회지만 가장 규모가 큰 증권업협회장 출신인 황 회장이 증권사 입장만 대변했다는 불만도 강하다. 또 황 회장이 중소형사인 메리츠증권 사장 출신이다 보니 대형 증권사 이익대변에 소홀했다는 불만도 적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랩어카운트 때문에 펀드시장이 입은 타격은 엄청나다. 그런데 정작 협회는 증권사 이익과 직결된 랩어카운트 문제에 대해 소홀했다. 금융투자협회가 됐지만, 여전히 증권업협회처럼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장기집권에 대한 반감과 자산운용사들의 서운함, 그리고 ELW 관련 증권사들의 불만이 겹쳐 현재의 반 황 기류가 형성된 셈이다.
선거전이 본격화하면 황 회장 측은 증권업협회장을 제외한 금융투자협회장 재임기간은 3년에 불과하다는 점으로 장기집권 공세를 방어할 듯하다. 여기에 재임 중 자본시장법 제정 및 개정 등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에 기여했고, 이를 정착시킬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증권업협회 회장 및 국제투자자교육연맹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할 전망이다.
세계증권업협회장은 한국금융투자협회장 자격이 필요하지만, 국제투자자교육연맹 회장은 개인자격이다. 그만큼 한국금융투자업계의 세계적 위상을 높였다는 명분이 가능하다. 지난 2009년 초대 금융투자협회장 선거에서 단독후보로 추천될 정도로 정·관계 인맥이 두텁다는 것도 강점이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꼽히는 황성호 우리투자증권 사장은 제일투자신탁증권, PCA자산운용 등 자산운용사 대표를 두루 역임한 데다, 대형 증권사까지 경영한 경험이 있다. 현재 금융투자협회장 선거는 회원사 자산규모별로 투표권이 배분돼 대형사와 자산운용사의 표를 모두 가져온다면 천군만마다.
황 사장은 현 정권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인 데다,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의 지원도 기대할 수 있다. 다만 ELW 관련 소송에서 실형을 받을 경우 자칫 결격요건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부담이다. 11월 대신증권을 시작으로 1심 판결이 예상되는 만큼 그 결과에 따라 황 사장의 출마 여부가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전상일 동양종금증권 부회장의 경우 회원사 내 세(勢)에서는 황 사장에 못 미칠 수 있지만, ELW 소송에서 제외 돼 있어 결격 위험이 없는 게 장점이다. 따라서 황성호 사장이 ELW 소송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얻고, 다른 후보가 없을 경우 반 황건호 측의 대안이 될 가능성은 열려있다. 동양자산운용 대표이사 경력도 있어 자산운용사의 지원을 얻을 여지도 있다. 전 부회장은 일찌감치 지난 9월부터 ‘캠프’ 수준의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인 스스로 고사하고 있지만 김지완 하나대투증권 사장도 타천 후보군에 들어간다. 증권가 최장수 CEO에다 최연장자(1946년생)다. ELW 소송에서도 빠져 있으며, 하나대투증권이 자산운용업계의 뿌리인 투신권의 간판기업이라는 점에서 자산운용사들의 호응도 기대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속한 하나금융그룹 김승유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출마를 결심하고 김승유 회장의 지원까지 등에 업는다면 강력한 후보가 될 수 있다.
내년은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해로, 총선과 대선이 예정돼 있다는 점에서 정·관계 인사가 낙하산으로 내려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금융투자협회가 민간단체로서 증권사를 규제하는 권한을 법적으로 위임 받은 자율규제기관이고 금융당국과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한 점 등은 정치인 또는 관료 출신 회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예우에 대한 국민 정서가 곱지 않은 데다, 정권 말 자리 챙겨 주기라는 비난을 피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