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에스텍파마 김재철 대표이사는 “우리에게는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에스텍 DNA’가 있다”며 글로벌 제약산업의 신화 창조를 자신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다른 회사 공장을 빌려 중간단계 시제품을 만드는 데 예상치 못한 기술적 문제가 발생했어요. 없는 돈에 원료 사서 제조했는데 눈앞이 캄캄했죠. 예상보다 딱딱하게 나왔는데 밤새 고민 고민을 하다 망치로 깨 재생해 70%를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초산, 쉽게 얘기해 식초를 쓰는데 집에 들어가 보니 주머니 속 백 원짜리 동전이 녹색으로 코팅됐더군요. 초산 많이 쐬면 동전이 파랗게 된다는 얘기는 들어봤는데 그때 처음 봤죠.”
경기도 군포에 30평짜리 사무실 겸 실험실을 만들어놓고 첫 제품인 위궤양치료제를 만들던 시절 김재철 대표의 회고다. 결국 첫 제품은 2~3주 시간이 더 걸려서야 빛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개발단계인 수출 대체 원료라 제약사 쪽에서 기다려 줬고 김 대표는 첫 매출의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이때가 1994년 말. 10년간 다닌 직장을 그만둔 지 2년여 만의 일이다. 사실 그는 부친의 사업 실패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 창업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화학과를 졸업하고 화장품회사 연구원으로 입사했는데 뜻하지 않게 의약사업부로 발령이 났고 곧 제약사로 분리됐습니다. 독립하다보니까 CEO(최고경영자)들이 영업만 강조했죠. 연구소에서 제품을 개발해 상품화 하려고 해도 설비와 인력 투자가 미흡한 거예요. 답답해서 연구원인 제가 직접 영업까지 했습니다. 오더를 따오면 설비투자를 좀 해줄까 했는데 그것도 안 되더군요.”
그는 작은 제약사들과 일해보자는 생각에 서울 포이동에 15평 남짓 사무실에 5평짜리 실험실이 있는 외주연구소를 차렸다. 이직도 생각해봤지만 ‘다른 데 가서도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접었단다. 그러나 작은 회사들은 돈에 더 집착했다. 그는 결국 서울을 벗어나 사무실을 확장하고 첫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2년여 자금을 모아 1996년 100평짜리 공장을 임대했고 이듬해 공장을 두 배로 넓혔다. 그 즈음 외환위기가 닥쳤다.
“설비투자를 위해 주거래은행에서 대출받기로 한 날 이틀 전에 은행이 문을 닫았어요. 사업 초기 제 철칙이 직원 급여 날짜 안 어긴다는 거였는데 그때 설날 보너스를 연말에나 줄 정도로 자금사정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환율 폭등으로 수입 제품 가격이 두 배나 올라간 반면 우리 제품은 싸고 좋으니까 매출이 세 배나 늘고 수익도 증가했어요. 자금 측면에선 어려웠지만 오히려 국내시장 확대엔 도움이 됐습니다.”
제약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사업이다. 아무리 싸다고 아무 원료나 사가지는 않는다. 위기 속에서 에스텍파마가 빛난 것은 끊임없는 기술개발 덕이다. 초창기 기술적으로 해결해야할 고비들은 수없이 많았는데 그때 포기하지 않고 해결했던 게 에스텍파마의 저력이 됐다.
“연구원들 새벽까지 일 시키고 나서 미안하다고 제 차로 집에까지 태워주는 게 일상사였어요. 당시 혈전치료제를 개발하고 막상 양산에 들어가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실패할 때마다 1000만 원씩 날아가니 큰일 난 거죠. 연구원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직원 하나만 남아 끝까지 해봐야지 않겠느냐고 버텨요. 자체 설비가 없어서 외부에서 테스트 해오고 몇 번 생산 실패로 수천만 원 날리고 나서야 힌트가 잡혀 해보니 되는 거예요. 그날 마지막까지 남은 직원이 너무 고마워 집에 가서 펑펑 울었습니다. 그 직원이 지금 생산 책임자로 있습니다.”
김 대표는 2000년 경기도 안산에 1000평 규모의 자가 공장을 매입하며 성장의 기틀을 닦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연매출 30억 원 규모일 때 20억 원을 공장에 들였다는 것. 2008년 연매출 255억 원대일 때는 250억 원 들여 경기 화성에 미국 우수의약품제조 기준(cGMP)의 공장을 지었고 지난 8월엔 148억 원을 투입해 화성공장 증축에 들어갔다. 무모해보이기까지 한 공격적 투자다.
“외부에서 보면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우리가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인프라를 갖춰야 합니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늦출 수도 있지만 그러면 실기할 수 있죠.”
에스텍파마 매출의 현재 수출 비중은 70%대다. 이는 내년 80%, 최종 90%까지 늘릴 계획이다. 그는 1998년 임대 공장 시절부터 수출을 준비해왔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일본은 특히 까다롭죠. 2004년 기회가 주어졌어요. 일본 상사들과 접촉하다 보니까 대기업이 개발한 물질이 특허가 끝나 가는데 일본은 물론 유럽 쪽도 제네릭(복제약)을 개발 못한다는 거예요. ‘오케이, 그럼 우리가 한다’ 하고는 우리 연구팀하고 벤처기업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해 일본 특허까지 받고 2007년 판매를 시작하니 갑자기 유명해졌어요. 그게 일본 시장을 뚫는 계기가 됐습니다. 조만간 일본에서 좋은 소식 있을 겁니다.”
개발 과정에서 일본 측이 공장을 둘러보고 여러 요구사항을 내놓자 직원들은 못하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김 대표는 “못하는 게 어딨냐. 일본이라고 대수냐”라며 설비를 임시로 보완하고 밀어붙여 성공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아 박박 우겼던 게 결과가 다 좋았어요. 이제 덜 우기려는데 직원들이 더 적극적일 때가 있습니다. 되레 ‘이런 거 해야합니다’ 하는 거예요. 좋은 현상이죠. 이런 걸 우리끼리는 안 되는 걸 되게끔 하는 ‘에스텍 DNA’가 있다고 얘기해요.”
핵심원료의약품(API) 사전충전형주사기(PFS) 유전자치료제 등을 미래 주력사업으로 삼은 에스텍파마의 비전은 ‘글로벌 제약산업의 신화 창조’다. 머잖아 신화는 완성될 듯하다. ‘에스텍 DNA’가 있기에.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
돈 아닌 꿈 위해 사업해야
1.일단 도전하라. 포기하면 기회가 없다.
2.도전해서 그 길이 옳다고 판단되면 끝까지 현실화, 사업화시켜라. 정 어렵다면 중간에 멘토 역할 해줄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의 도움 받아서라도 이뤄내라.
3.사업은 꿈을 위해서 하라. 돈을 위해서 하면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돼 실패한다. 사람과 네트워크를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