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 10월 27일 ‘재무구조개선약정 제도의 문제와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제도 폐지를 주장했다. 금융위기 당시 상황과 지금은 다르며 무엇보다 우량기업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제도는 금융위기 이후 기업들의 부실을 사전에 막고자 강화됐다.
금융권이 직접 기업의 무리한 투자와 방만한 경영을 관리해 기업의 재무건전성을 개선한다는 취지는 좋다. 하지만 이 제도는 진작부터 입장 차이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다. 시기와 업종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제도라는 반발도 있다. 실제로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은 기업들과 금융권의 엇갈리는 시각을 통해 불붙는 논란 속으로 들어가 봤다.
지난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강화된 재무구조개선약정(재무약정) 제도에 대한 논란이 본격적으로 점화된 계기는 지난해 재무약정 대상 기업으로 선정된 현대그룹이 약정 체결을 거부하며 강력 반발하면서다. 당시 현대그룹은 외환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을 향해 “주거래은행을 바꾸겠다”는 초강수까지 두며 재무약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현대그룹의 그 같은 대응은 재계 일각에서 산업자본이 더는 금융자본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환영받기도 했다. 현대그룹이 채권단에 강력 반발한 까닭은 현대건설 인수전을 앞둔 민감한 시기였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총공세를 취하며 그룹의 사활을 걸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덜컥 재무약정을 체결하면 인수전에서 밀려날 것이 뻔했다. 현대그룹 측은 “그보다는 업종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은 처사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고 밝혔다.
채권단은 버티는 현대그룹에 대해 대출 중단·회수 등 제재 조치에 나섰으나 현대그룹은 법원에 효력 중단 가처분신청을 내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법원은 결국 채권단의 부당함을 언급하며 현대그룹의 손을 들어줬다. 이때부터 채권단의 일방적인 재무약정에 문제점에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기업들은 재무약정이 기업 활동과 기업의 선순환구조에 저해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한다. 이미지가 훼손돼 경쟁사들의 방해 공작에 이용당하기 십상인 데다 추락한 이미지 때문에 영업에 차질이 온다는 것이다.
반면 금융권은 국민경제와 금융시장의 악화를 막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우리나라 전체 금융사 여신의 0.1%를 넘은, 상대적으로 큰 대기업 중에서 선정하는 것이어서 만일 해당 기업이 무너질 경우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취약한 재무구조를 미리 개선해 부실을 막고 부실이 그룹 전체로 퍼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해 국민경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금융권의 주장이다.
재무약정 대상 기업을 선정하는 데는 여러 기준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부채비율이다. 즉 빚이 많은 기업이 선정되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기업이든 개인이든 부채가 많은 쪽에 채권자로서 요구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괜찮다고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더 큰 화를 초래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금융감독원은 매년 전체 금융사 여신의 0.1%를 넘는 대기업을 ‘주채무계열’로 선정한다. 올해 금융사 전체 여신의 0.1%에 해당하는 1조 3962억 원을 넘은 대기업은 모두 37곳. 여기에는 삼성 현대차 SK LG 등 거대 그룹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 금감원의 발표를 토대로 각 채권은행은 이들의 재무 상태를 파악해 정도가 심각한 기업을 선정, 재무약정 체결 대상으로 선정한다.
이 과정에서 재무약정 대상 기업이 전부 공개된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 대기업 임원은 “재무구조개선운영준칙에 ‘기밀유지 조항’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심사 기준이나 진행과정 등은 이를 적용하지만 기업 이름들은 모두 오픈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기업들이 항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업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기업집단’으로 묶이는 바람에 우량 계열사마저 추가 대출 등이 제한된다는 것은 억울하다는 것이다. 일부 기업은 업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는 불만도 토로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대한항공과 한진해운 등을 거느리고 있는 한진그룹이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최근까지도 재무약정 때문에 투자에 어려움이 있음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 역시 재무약정이 산업별로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을 주문했다. 항공·해운업종의 경우 항공기와 선박을 발주하는 것이 부채로 잡힌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10월 27일 발표한 전경련 보고서의 주장도, 지난해 현대그룹이 불만을 제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한항공은 최근 5년 만에 직원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한진해운은 대규모 유상증자에다 임원들이 임금 10%를 반납하기로 결의했으며 부산감천터미널 부지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한진해운의 경우 유동성을 확보하고 재무구조를 미리 개선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대한항공의 희망퇴직 역시 재무약정의 일환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한항공 관계자는 “어디까지나 희망퇴직이다. 희망자가 없으면 못하는 것”이라며 “이는 재무약정과 관계없다”고 밝혔다. 재무약정 이행에 관해서 그는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이행했는지 확연히 드러난 것은 없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정말 재무약정은 기업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일까. 채권단과 재무약정을 맺은 한 대기업 관계자는 “재무약정은 기업 입장에서 득 될 것이 거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대내외적으로 기업 이미지가 추락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장기적 투자와 경쟁력 강화에 매진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 관계자는 “자산을 매각하고 인력 구조조정을 해야 할 판에 신규 사업 진출이나 M&A(인수·합병)가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해당 기업 직원들로서도 재무약정은 달갑지 않은 존재다. 안에서는 구조조정과 임금 삭감 등이 언제 내려질지 몰라 늘 좌불안석이고 밖에서는 지인들로부터 회사 상황과 개인적인 위치에 대한 질문에 시달려야 한다. 또 갖가지 위기설에다 경쟁사들의 모함까지 감수해야 한다.
재무약정을 맺은 기업이 모두 위축돼 있는 것은 아니다. 동부그룹의 경우 오히려 활발한 M&A를 실시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과 투자 행보를 보이고 있다. 동부그룹 관계자는 “대부분 스몰딜에 해당하며 재무구조에 영향을 미칠 만큼 규모가 크지 않다”며 “최근 투자 행보에 대해 채권단으로부터 별다른 제약은 없었다”고 말했다.
물론 기업들이 채권단이 요구하는 재무약정을 꼭 체결해야 할 의무는 없다. 지난해 현대그룹의 경우처럼 주거래은행의 채무를 갚아나갈 능력이 되고 회사가 탄탄하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기업 중 금융권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는 기업은 많지 않다. 앞서 언급한 재무약정 체결 대기업 관계자는 “만일 채권단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당장 대출 중단에다 회수가 들어올 텐데 그걸 어떻게 버티겠느냐”고 말했다.
비록 기업 입장에서 섭섭한 면이 있더라도 진행 과정이 탄력적이라면 좋은 취지에 걸맞은 제도라는 의견도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좋은 취지가 남용되지 않고 기업 선순환을 크게 저해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좋은 제도”라고 밝혔다.
올해 재무약정 기업은 모두 6곳이다. 지난해 9곳(현대그룹 포함)에서 유진그룹과 애경그룹이 재무 상태가 좋아져 제외됐다. 이 6개 기업은 또 다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금감원은 그동안 재무약정 제도를 수차례 보완하기도 했다. 또 금융위원회 기업재무구조개선지원단에서도 기업들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금감원과 금융위로 나눠져 있는 것도 복잡하고 까다로워 보인다. 금융위 재무구조개선지원단 관계자는 “제도가 제대로 이행되는지 계속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