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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5일 전국생명보험산업노동조합 흥국생명지부(흥국생명 노조)는 사측이 전 직원을 계약직으로 전환하려 한다는 문서 두 장을 공개한 바 있다. ‘단계별 주요 Activity 및 준비사항 일정’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직원들을 연봉계약직화하면서 노조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한 단계별 일정을 기록한 표다.
당시 이 문서는 인사과장이 인사부장에게 보낸 이메일(E-mail)에 붙어 있었고 노조간부인 임아무개씨(교육선전국장)가 인사부장의 이메일을 열어본 뒤 노조 홈페이지에 공개한 것이다. 임씨는 이메일 비밀번호에 인사부장의 생년월일을 입력했는데 이것이 우연히 맞아 이메일을 열어볼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측에 따르면 이 문서는 과장급 이상 간부들을 대상으로 연봉제를 실시하기 위해 인사과장과 인사부장 둘이서만 검토한 뒤 폐기한 문서인데 노조가 이를 ‘전직원’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며 과대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문서가 공개되자 처음에는 인사과장과 인사부장이 서로를 문서 유출자로 의심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이 문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이들 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곧 자신들의 컴퓨터에 해킹감지 프로그램을 깔아 타인이 컴퓨터에 접근한 기록을 일일이 감시했다. 이후 하루에도 몇 번, 한 달 간 50건이 넘는 컴퓨터 접근 흔적을 발견한 뒤 6월 말 종로경찰서에 신고했다.
사측에 따르면 임씨는 인사과장, 인사부장의 컴퓨터뿐만 아니라 경리부장, 영업기획과장 등의 컴퓨터에도 접근해 임직원의 연봉, 신상정보 등을 모두 다 빼갔다고 한다.
신고를 받은 종로경찰서는 임씨의 컴퓨터를 압수수색해 조사한 뒤 임씨가 지난 2000년부터 7백여 건이 넘는 회사정보를 열람했음을 밝혀냈다. 8월30일 경찰은 임씨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노조위원장, 수석부위원장, 부위원장 등 4명을 이에 가담한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한편 노조측은 임씨가 ‘해킹’을 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임씨가 열람한 것은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공유된 문서들이고 단 한 번 인사부장의 이메일을 열람했다는 것이다. 특별한 해킹 툴을 쓴 것도 아니고 우연히 비밀번호가 생년월일과 맞아 열어보았다고 한다.
흥국생명 직원들에 따르면 부서 내부뿐 아니라 업무 연관성이 있는 부서끼리 자료를 공유하기도 하는데 보안이 필요하지 않은 자료는 공개가 되어 있고, 일부 자료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공유가 가능하지만 업무를 위해 서로 비밀번호를 공개해 놓기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노조측은 임씨가 열람한 자료들이 업무상 공개된 자료들이고 이를 외부에 유출하거나 악의적으로 이용하지 않은 이상 해킹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사부장의 이메일에서 발견한 문건의 경우 노조간부로서 흥국생명 직원들에게 중대한 문제라고 판단해 부득이하게 제보 형태로 공개했다는 것이다.
개인 이메일을 열어본 것에 대해서는 통신비밀보호법에 저촉되는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사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경찰에 고발한 사측에 유감을 표했다. 사측이 노조의 불법행위를 고발한 반면 노조측은 사측이 형사고발을 한 배경에 문제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흥국생명의 노사불화는 업계에서도 유명하다. 특히 2000년부터 진행된 구조조정과 2003년 노조의 장기파업으로 노사관계는 극심한 불화 상태다. 2000년 3천4백 명이던 직원이 그간 구조조정으로 5백 명으로 줄었다는 것이 노조의 주장이다. 올해 초에도 두 차례에 걸쳐 명예퇴직과 아웃소싱을 통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노조 관계자는 “올해 9월 노조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사측이 노조의 힘을 빼기 위해 압박을 가하고 있다. 노조가 상대적으로 약해져 있을 때인 지난해 일방적으로 단체협약을 파기하고 올해 초 두 차례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번 선거에서 사측이 지지하는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현 노조의 도덕성을 계속 문제삼고 나선 것이다. 이런 배경도 함께 고려해 달라”는 입장이다.
사측은 “노조가 너무 강성이다. 매년 파업을 한다. 임금을 15% 인상하는 데도 파업을 할 정도다. 전임위원장이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는 등 사내 문제는 아랑곳 않고 정치적 고려에 따라 회사를 흔들고 있다”며 노조를 비난하고 있다.
괴문서 유출, 해킹 논란 등 일련의 소동으로 어수선한 흥국생명의 노사대립이 어떤 방향으로 결론이 나게 될지 업계와 노동계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