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드론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금융감독원 건물 앞에서 시위를 펼치고 있다. 사진출처=카드론 대출 피싱 피해자 소송 모임 |
많은 사람들이 보이스피싱 피해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의 반응이다. 하지만 날로 교묘해지는 보이스피싱 수법 앞에 그 누구도 안전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과거 보이스피싱은 개인정보를 빼내 현금을 인출하는 것에 그쳤지만 이제는 카드론까지 그 대상이 됐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금융당국이 나서 대출 본인확인절차 강화 등 행정지도에 나섰지만 여전히 피해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이미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한 대책은 전무하다. 피해자만 있고 해결책은 없는 ‘카드론 보이스피싱’ 논란 속으로 들어가 봤다.
기존의 보이스피싱은 계좌에서 돈을 빼내감으로써 피해가 발생했지만 카드론피싱은 돈이 들어오는 것이 특징이다. 수사기관 등을 사칭하며 “개인정보 유출 사건으로 수사 중이다”고 한 뒤 “당신도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신용카드번호, 비밀번호, CVC(유효성 코드)를 알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주된 수법. 거짓말에 속아 모든 정보를 알려주면 범인들은 이를 이용해 카드론을 신청하고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전화를 받으면 “조회를 해보니 범죄자금이 입금된 것으로 나온다. 공범으로 몰리고 싶지 않으면 돈을 이쪽으로 보내라”고 겁을 줘 돈을 가로채는 것이다. 카드론의 특성상 입금이 바로 이뤄지는데 피해자들은 “나도 모르는 거액의 금액이 계좌로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은 수법의 카드론피싱은 지난 5월부터 집중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지난 9월 피해자들이 모인 한 인터넷 카페는 개설 두 달 만에 820여 명의 회원이 가입해 대책마련 촉구에 나섰다. 카페에 올라온 자료를 바탕으로 집계된 피해자만 500여 명, 피해금액은 100억 원으로 최근까지도 꾸준히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직장인이었는데 그 중에는 교수, 변호사를 비롯해 경찰까지도 포함돼 있었다. 피해금액도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이 넘는 거액까지 다양했다.
금융소비자협회 측은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선 이들의 피해만 해도 이 정도인데 실제 피해사례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직 은행지점장까지도 카드론피싱으로 피해를 입을 정도로 이번 보이스피싱 사건은 일반인이 사기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수법이 치밀했다”고 밝혔다.
협회 관계자는 “문제의 핵심은 범죄 수법이 아닌 카드론 이용절차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카드사들이 보이스피싱의 위험성을 알고도 카드론 이용절차에 대한 개선이나 소비자들에게 주의를 주지 않음으로써 범죄환경을 제공한 셈이 됐다”며 “이는 범죄에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방치한 미필적 고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신용카드사들을 이번 보이스피싱 사건의 공범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피해자들도 카드론피싱의 피해는 카드사의 소극적인 고객보호 정책 탓이라 말한다. 피해자 모임 이대원 대표(59)는 “금감원의 행정지도 사항이 잘 지켜질지도 미지수이고 본인확인절차만 강화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그 누구도 문제의 핵심을 바로 바라보는 사람이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 대표는 “제대로 본인확인을 하지 않은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카드사 측에서 대출 한도를 임의로 늘려놔 피해를 더욱 키웠다. 카드사의 자체적인 기준에 의해 조정했다는데 피해사례를 보면 그 기준이 뭔지도 명확하지 않다”면서 “카드사도 이러한 상황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외면하고 있다. 사실 카드사가 사채 수준의 이자를 받으면서 카드론 영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든 문제의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이 대표를 비롯한 카드론피싱 피해자들은 피켓 시위를 벌이는 등 자체적으로 피해구제 활동에 나섰다. 감사원에 카드사의 카드론 영업을 규제해달라는 내용이 담긴 진정서를 제출하고 카드사를 상대로 민사소송도 제기했다. 지난 22일 첫 조정이 있었으나 한 카드사는 이를 거부했고 다른 카드사는 조정을 한 차례 연기한 상태라고 한다.
금융당국도 카드론피싱 피해확산을 막기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다. 지난 5월 경찰청의 ‘전화금융사기 근절을 위한 국민토론회’에서 카드론피싱의 문제점이 공개적으로 다뤄진 후 금융감독원이 직접 문제 진화에 나섰다. 실제 금감원은 카드사들로 하여금 국제전화 또는 인터넷전화번호로 대출을 신청하는 경우 휴대폰 인증번호 발송, 본인 확인 전화통화(되걸기), 공인인증서 로그인 등을 반드시 거치도록 지도공문을 보냈다.
금감원 관계자는 “절반 정도의 카드사들은 행정지도를 따라 본인확인절차를 강화한 것으로 조사됐다. 문제는 아직까지 시행하지 못한 카드사들인데 이들 카드사를 통한 카드론피싱은 꾸준히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때문에 늦어도 11월 말까지는 모든 카드사들이 본인확인절차를 강화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들의 보상 문제에 관해서 이 관계자는 “각 개인들의 피해액이 적지 않은 만큼 보상에 대한 논의도 고려하고 있다. 다만 현재 카드사와 피해자들 사이에 민사소송이 여러 건 진행 중이라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소송 결과가 나와 봐야 본격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처럼 ‘카드론 보이스피싱’의 피해규모도 커지고 법적 문제까지 이어지자 카드사들도 무조건 외면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카드사는 “우리들도 피해를 입은 고객의 사연을 접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고객의 부주의로 인해 발생한 사건인 만큼 현실적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방적인 카드한도 조정과 관련한 논란에 대해서도 카드사 관계자들은 “정해진 규정에 따라 한도를 조정한 것이다. 한도 조정 전후 본인에게 공지가 이뤄지는 만큼 문제될 부분은 없다”고 말했다.
일부 카드사는 피해자들의 끈질긴 항의 끝에 몇 가지 대안을 마련했다. 한 카드사 측은 “적법절차를 거쳐 대출을 한 것이기 때문에 피해 원금을 감면해주는 것은 어렵지만 이자를 삭감하거나 장기간으로 분할상환을 하는 방법을 제안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또 “만약 본인에게 알리지 않고 카드한도가 늘어나 피해금액이 늘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그만큼의 금액은 보상해줄 수도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카드사 관계자도 “아직까지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한 대책을 마련 중이다. 원금 삭감, 무이자 상환 등 다방면으로 고려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카드론피싱 피해자들은 “강하게 항의하는 사람들에게만 선심 쓰듯 혜택을 주고 있는 상황”이라며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어 논란은 계속될 듯하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