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구 현대차 회장(왼쪽)과 정의선 사장. 가운데는 김익환 기아차 사장. | ||
지난 20일 현대차그룹은 박정인 현대모비스(옛 현대정공) 회장(63)의 퇴진을 알렸다. 이는 현대정공을 창업했던 정몽구 회장(MK) 주변에 모여들었던 MK사단 1세대의 퇴진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인 셈이다. 현대차는 박 회장 후임에 현대정공 기술연구소장을 지낸 한규환 현대모비스 사장(56)을 부회장으로 발령냈다.
정 회장의 ‘깜짝스런’ 면모는 정석수 사장의 현대모비스 사장(54) 임명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올 초 김무일 부회장이 INI스틸로 오자 INI스틸의 대표이사였던 정 사장은 현대파워텍으로 옮겼다. 그는 현대모비스 경리 담당 출신으로 2001년 현대하이스코 관리본부장(전무)으로 승진하면서 매년 보직을 옮겼다. 2002년 INI스틸 대표이사 부사장, 2003년 현대캐피탈 대표이사 부사장, 2004년 INI스틸 사장, 2005년 1월 현대파워텍 사장, 그리고 지난 9월20일 현대모비스 사장으로 친정에 다시 복귀했다. 한마디로 정신없이 옮긴 것.
재계의 관심은 정몽구 회장이 왜 이렇게 인사철이 아님에도 주요 임원들에 대한 인사발령을 수시로 내는가에 쏠려있다.
일단 이번 인사는 세대교체와 이를 통한 정의선 사장에 대한 2세 승계구도를 앞당기기 위한 배려로 보는 시각이 대세다.
지난 2004년 유인균 회장의 일선 퇴진에 이어 박 회장의 퇴진으로 현대차그룹에서 정 회장을 빼고 60대 회장단이 사라졌다. 김동진 부회장을 위시해 주력 경영인들이 50대 중후반으로 낮아졌고, 회장 직함도 정 회장을 빼고는 높아야 부회장이다.
올해 나이 68세인 정몽구 회장은 최근 들어 부쩍 2세 승계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의 외아들인 정의선 사장은 지난 3월 사장으로 승진했다. 주요그룹들 중 가장 빠른 속도다. 정 사장은 기아차 사장-현대차 사장-현대모비스 사장 등 주요 3사의 사장 자리에 모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때문에 정 사장의 부회장 승진이 임박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정 회장의 잦은 사장단 인사가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현대차그룹의 사장단 인사는 정기 인사라고 볼 수도 없다.
올해만도 1월에도 있었고 3월에도, 8월에도 있었다. 이것으로 부족했는지 9월에 또한번 깜짝 인사가 벌어진 것. 그래서 정 회장의 인사를 회오리 인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벼락치듯 순식간에 벌어진다는 것이다.
▲ (왼쪽부터) 김동진 현대자동차 부회장, 한규환 현대모비스 부회장, 정석수 현대모비스 사장 | ||
재계의 중론은 ‘당근’과 ‘채찍’이다. 성과가 있는 곳에는 확실히 챙기고, 이루고자 하는 곳에는 당근을 제시해 직원들의 능력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최근 정 회장은 한보철강을 인수해 고로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이를 담당하는 INI스틸 쪽에서는 정 회장이 수시로 당진의 공장을 찾는 통에 항상 비상상황이다. 정 회장이 언제 들이닥쳐서 진행 상황을 물을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대기 상태라는 것. 여기에는 ‘당근’이 힘이 된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정 회장이 당진 공장을 찾았다가 현장 직원들 중에서 준비에 철저하고 일을 열심히 하는 직원을 발탁해 5년 넘게 걸릴 승진을 그 자리에서 시켜주자 그 풍문이 삽시간에 사내에 퍼졌다는 것. 이후 현장 근로자건 후방 스태프이건 눈에 불을 켜고 일을 하며 당진 공장 정상화와 고로진출에 사력을 다해 매달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 속도’가 생기는 것이다. 고생하면 고생한 만큼 챙겨준다는 것.
정 회장과 함께 원효대교 밑 현대정공 빌딩에서 고생했던 이들은 지금 모두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의 사장단을 휩쓸고 있다. 김동진 부회장, 김익환 사장, 한규환 부회장 등이 바로 그들.
물론 이런 논공행상도 성과가 있을때 한해서다. 실패하면 책임도 가차없이 묻는다.
지난 2004년 6월에는 엔지니어 출신인 박황호 현대차 사장(60)이 돌연 사임하고 고문으로 물러났다. 현대차의 설명은 결재라인 효율화였다. 기획· 국내외영업담당 사장이던 그가 국내외 영업본부장(부사장)과 업무가 겹쳐서 사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현대차 주변에선 그가 베이징올림픽 공식 스폰서 선정 사업에서 현대차가 떨어진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 김원갑 하이스코 부회장(왼쪽), 김평기 위아 사장 | ||
이런 용인술은 주로 현대차나 기아차 등 MK사단이 지난 99년 접수한 신규 사업장에서 더욱 자주 보인다.
반면 정 회장이 직접 창업하다시피한 회사에서는 좀 다른 용인술이 눈에 띈다.
특히 현대차그룹에서 정 회장의 측근 경영인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수시로 바뀌는 현대차나 기아차 경영진을 보는 것보다는 계열사 임원 현황을 보는 게 더 빠르다는 우스개도 있을 정도로 현대차 계열사에서는 장수 사장이나 ‘사장 다관왕’이 의외로 많다.
대표적인 예가 김평기 사장(61)이다. 그는 위아(주)와 위스코(주), (주)로템, 아주금속공업(주)의 대표이사 사장이다. 사장 4관왕인 셈이다.
김 사장은 로템에선 연하의 정순원 부회장(54)을 모시고(?) 있기도 하다. 정 부회장도 공동 대표이사이긴 하지만 부회장이라는 직함이 대개는 명예직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 김 사장의 파워와 위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위스코는 현대차그룹의 황태자 정의선 사장의 개인지분이 57.87%에 달하는 등 사실상 정 사장 개인회사나 마찬가지다. 김 사장에겐 회사를 잘키워 정 사장이 대권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보호하는 ‘황태자 보호’의 막중한 임무가 하나 더 있는 셈이다.
이런 황태자 보호군단에는 이중우 다이모스 사장(58)도 뺄 수 없다.
현대정공 출신인 그는 MK사단의 관리통이자 정몽구 회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되고 있다.
지난 2002년 현대차 부사장을 끝으로 현대차 전면 무대에서 몸을 감춘 그는 다이모스 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5월엔 그동안 그가 맡아왔던 양궁협회장을 정의선 사장에게 ‘무사히’ 인수 인계하는 등 후계 양성 구도에도 여념이 없다.
현대그룹이 2세 분열로 이어지기 전에 현대그룹 종합기획실의 재무통이던 김원갑 현대하이스코 부회장(54)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잘나가고 있다.
지난 97년 현대산업개발로 옮기면서 MK사단에 합류한 그는 지난 2003년부터 현대하이스코의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현대차그룹에선 장수 사장 대열에 올라섰다.
당근과 채찍, 내부 경쟁을 유도하는 정몽구 회장의 독특한 용인술 덕분인지 현대차그룹은 지난 2000년 8월 현대그룹에서 공식 분리된 이후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다. 최근에 정 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누르고 보유 주식의 시가총액으로 비교한 국내 주식 부자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