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중공업 계열사의 지분 변동이 눈길을 끌고 있다. 울산공장 전경과 정몽준 의원. | ||
정 의원은 최근 현대중공업 고문직도 반납하면서 외견상 그룹 경영에 크게 관여치 않는 ‘대주주’ 역할만 하는 모양새를 보여왔다. 그룹측 인사들에 따르면 정 의원은 현대중공업 사옥에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엔 자신의 향후 입지 강화와 정치적 포석이 깔려있을 것이란 관측이 대두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자사 계열사들이 상호 지분 매입을 통해 현대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현대중공업의 순환 출자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현재까지 현대삼호중공업은 현대미포조선 지분율을 34.89%에서 37.96%로, 현대미포조선은 현대중공업에 대한 지분율을 5%에서 9.92%로 늘렸다. 현대중공업은 현대삼호중공업 지분 94.92%를 소유하고 있다.
특히 현대미포조선의 지분 매입 규모가 눈에 띈다. 현대미포조선은 지난해 12월부터 지금까지 현대중공업 지분 매입에 1천8백억여원을 투입했다. 지난해 현대미포조선 순이익 1천63억원을 웃도는 금액이다. 지분 투자는 각 계열사의 자체적 결정이라기보다는 정 의원의 의사가 크게 반영됐을 것이란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즉, 경영권 안정 확보 차원에서 자사 계열사의 상호 지분 매입이 이뤄졌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최근 들어서는 정 의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아산재단의 지분 매입이 눈길을 끈다. 아산재단은 지난 9월6일부터 10일간 현대중공업 지분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지분율을 2.05%에서 2.18%로 끌어올렸다. 약 10만 주를 사들인 것으로 9월6일 주가 기준으로 볼 때 71억원가량을 지분 매입에 쏟아 부은 셈이다.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측은 “아산재단은 (정몽준 의원) 임의대로 지분 투자를 하는 곳이 아니다”라며 “아산재단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복지사업을 위해 사재를 털어 만든 기관이다. 공익사업을 위한 재원 확보 차원에서 지분 투자를 하는 것”이라 밝혔다. 정 의원의 지배력 강화와는 무관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업계에선 정 의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아산재단이 확보한 현대중공업 지분을 정 의원에게 우호적인 지분으로 평가하고 있다. 아산재단 지분이 늘어나면 정 의원의 영향력 행사 폭이 그만큼 커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현재 그룹 내 지주회사격인 현대중공업의 주요 지분구조는 대주주인 정 의원 소유지분 10.80%, 현대중공업 자사주 15.14%, 현대미포조선 지분 9.92%, 아산재단 지분 9.92%, 그리고 임원들 소유 지분 0.02%로 이뤄져 있다. 즉, 정 의원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분율이 총 38.06%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12월 기준 30.96%보다 무려 7.1% 늘어난 수치다.
정 의원의 그룹 지배력 강화 행보는 지분율 확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정 의원은 이미 그룹 내 파격인사를 통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지난해 3월 주주총회에서 당시 유관홍 현대미포조선 사장이 최길선 현대중공업 사장과 자리를 맞바꿨다. 계열사 사장인 유관홍 사장이 지주회사의 사장직으로 영전한 것이었다. 올 6월 현대삼호중공업은 기존의 이언재 사장과 강수현 부사장 공동대표이사 체제로 바뀌었다가 두달 후인 8월에 강수현 1인 대표이사체제로 개편됐고 이언재 사장의 역할은 현대중공업 해양플랜트부문 사장직으로 사실상 축소됐다. 유 사장과 강 부사장 모두 지난 2001년 2월 현대그룹 계열 분리 이후 현대중공업이 정 의원 체제하에 놓이면서 실적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다. 정 의원 체제에서 괄목성장한 신흥세력인 셈이다. 일련의 인사과정에 대해 업계에선 “정 의원이 사장단 인사를 통해 그룹을 장악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돌았다.
국회의원직 수행과 대한축구협회장 업무, 그리고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역할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정 의원이 그룹 내 지배력 강화를 도모하는 배경으로 크게 두 가지가 거론된다. 첫 번째는 정 의원의 경영일선 복귀 가능성이다. 축구국가대표팀 성적 부진과 협회 행정의 안일함을 꼬집는 축구계 내 ‘반 정몽준’세력의 비난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와 맞물려 정 회장은 이번 대한축구협회장 임기를 끝으로 물러나겠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형식적으로나마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던 정 의원이 그룹 경영에 복귀할 경우에 대비한 구도 마련 차원에서 최근의 지분 확대와 인사가 이뤄졌다는 평이다.
두 번째로 정 의원의 정치일정과 맞물려 정 의원의 그룹 내 지배력 강화작업이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51년생으로 올해 우리나이 55세인 정 의원에 대해 ‘차기 대선에서의 역할이 정치생명의 분수령이 될 것’이란 진단이 정가에 나돌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막판 철회해 대선후보로서의 이미지를 구겼던 점, 5선 의원으로서 6선에 도전하기엔 세대교체 요구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 월드컵 축구 열풍을 등에 업을 수 있는 마지막 대선이라는 점 등에 기인해 정 의원이 차기 대선에 ‘올인’할 가능성이 타진되는 것. 대선과정에서의 ‘실탄’ 동원이나 조직력 극대화를 위해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은 정 의원으로서는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그룹 장악이 필수적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룹 관계자는 “(정 의원은) 대주주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라며 두 가지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모두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