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사실이 19일 낮 12시에 알려지면서 국정원과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등 정부 외교안보 라인이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 김 위원장이 실제 사망한 시각은 17일 오전 8시 30분이었지만 이러한 사실을 이틀 동안이나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경제부처 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지 그 속사정을 따라가 봤다.
지난 19일 오전 10시와 10시 23분, 10시 30분에 북한의 조선중앙 TV와 조선중앙방송, 평양방송 등이 이날 낮 12시에 특별방송을 할 것이라고 거듭 예고했지만 외교 안보부처 관계자들은 김 위원장의 사망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외교 안보 부처 공무원들은 12시에 등장한 북한 아나운서가 검은 색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사색이 됐다. 그동안 북한이 특별방송을 예고한 것은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소식을 전한 때 외에는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안이하기 짝이 없는 대응이었던 셈이다.
반면 김 위원장 사망 사실이 이틀 후에야 알려진 것에 대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곳도 있다. 기획재정부 등 경제관련 부처들이다. 그 ‘이틀’이 김 위원장 사망에 따른 불확실성을 그나마 상당부분 줄여줄 것이라는 해석 때문이다. 김 위원장 사망 사실이 이틀 후에 알려질 때까지 비밀로 유지됐다는 것 자체가 북한의 체제 승계가 무난히 이뤄지고 있다는 방증인 덕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김 위원장 사망 사실을 이틀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은 17일부터 19일까지 김 위원장 사후 발생할 수 있는 지도부 내부의 혼란을 정리하고, 권력 공백을 상당히 완벽하게 메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며 “예정된 수순대로 일을 추진하는 것으로 보아 정권이 나름대로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김 위원장 사후 권력승계자였던 김정은 북한 노동당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장의위원장을 맡았다는 것도 권력을 제대로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면서 “경제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북한의 움직임은 그나마 우리 경제에 미칠 혼란을 줄여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실제 국제 신용평가사들이나 해외 투자은행들도 북한의 권력이양이 어느 정도 순조롭게 진행 중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김 위원장의 사망 사실이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에 당장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며 “북한의 권력 승계가 순조롭게 이뤄지면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에는 변화가 없을 것”고 전망했다. 무디스도 “북한 내부에서 권력 구도에 어느 정도 변화가 있을 수 있겠지만 급격한 변동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전했다.
하지만 김 부위원장의 권력 승계과정이 2년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해 재정부는 대책 마련에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당장 신제윤 재정부 1차관을 중심으로 관계기관 종합 비상대책팀을 꾸리고 국제금융과 국내금융, 수출, 원자재, 생필품, 통화관리 등 6개 분야에 대한 24시간 감시체제에 들어갔다. 또 재정부 내부에는 강호인 차관보 지휘하에 비상상황실을 설치하고 매일 오전 8시와 오후 6시에 상황 점검회의를 하고 있다.
재정부는 환율이 급변동하거나 외화자금 시장이 경색되면 시나리오 단계별로 마련된 컨틴전시플랜(Contingency Plan·위기대응 방안)에 따라 대책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르면 외환시장의 경우 외국인 투자자금 유출로 금융기관 내 달러 흐름이 경색되면 외환건전성 부담금을 각 금융기관에 유동성 자금으로 지원한다. 달러 경색이 시중으로 확대되면 외환보유액을 시중에 풀게 된다. 이보다 더 위험해지면 외국환거래법상 정부가 해외투자자의 자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하게 하거나 수령 정지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는 세이프가드(Safe Guard·긴급 제한조치)가 취해진다.
주가 급락 지속시에는 정부가 비상금융안정기금을 통해 주식을 사들이며, 공매도 금지와 자사주 취득 완화 조치 등이 취해진다. 채권 시장 동요시에는 한국은행이 국고채 매입을 통해 채권 시장 안정을 유도하게 된다. 위기가 전방위적으로 확대돼 경제 성장률이 하락할 우려가 커지면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을 통해 경기 부양정책을 취하게 된다.
김서찬 언론인
‘걍, 신년회 하자’
김 위원장 사망 사실이 알려진 뒤 행정안전부는 비상근무 4호를 발령했다(22일 해제). 이에 따라 공무원들은 불필요한 행사나 연가, 출장을 자제해야 했다. 또 각 과별로 최소 1명이 남아 24시간 근무해야 했다. 대북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는 부처나 과들에도 이러한 규정은 예외 없다. 비상체제 근무에 돌입하면서 부처별 업무보고도 잇달아 연기돼 공무원들의 연말 휴가나 행사 참석은 사실상 불가능했었다. 20일 예정됐던 법무부와 법제처에 이어 21일 문화체육관광부의 업무보고도 취소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부부처들은 송년모임도 줄줄이 취소했다. 고용노동부는 당초 19일에 송년회를 하기로 했으나 부랴부랴 일정을 바꿨다. 통상교섭본부는 김 위원장 사망소식에도 예정대로 21일 저녁 송년회를 추진하려고 했으나 신년회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부 의견이 끊이지 않자 일정을 무기 연기했다. 지식경제부와 공정거래위원회는 22일 저녁으로 예정됐던 송년회를 취소했다.
문제는 최근 유럽재정위기에 따른 경제난으로 기업들이 송년회 행사를 자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부처마저 송년회를 줄 취소하면서 내수가 더욱 위축될 우려가 커졌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가계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상태에서 기업들마저 지출을 줄이면서 내수가 점차 위축되고 있다”면서 “연말 특수를 노리던 음식점 등이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 내수 감소로 당장 이번 달에 들어올 세수가 줄어드는 문제까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러한 우려를 반영하듯 김황식 국무총리가 20일 국무회의에서 “연말에 각 부처에서 예정한 송년회나 대내외 행사 등은 과도하지 않은 범위에서 통상적으로 추진해 달라”고 당부했지만 만약을 우려한 대부분의 부처들의 송년회 취소는 멈추지 않고 있다. 국가 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기획재정부가 27일 저녁으로 예정됐던 송년회 행사를 26일 점심으로 옮겨 치르기로 했고, 농림수산식품부가 당초 19일 저녁에 송년회를 하기로 했던 것을 29일 점심으로 날짜를 바꿨을 뿐이다.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