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월 30일 한나라당사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김종인 비대위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친이계로서도 총선 공천이 문제가 아니라 핵심들의 사법처리에 따른 계파의 궤멸을 걱정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하지만 박 위원장의 경우 지금 한창 쇄신과 공천 물갈이로 국민의 지지를 받는 형국으로 올라서야 하는데 돈봉투 자폭전에 가려 비대위 성공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양측의 교전은 재창당 전선에서 결말이 날 가능성이 크다. 친이계가 재창당에 다시 불을 붙이고 있고 소장파 핵심의원들도 다시 비대위 이탈을 거론하며 들썩거리고 있다. 박 위원장이 재창당 불가를 외치며 마이웨이를 선언했지만 그의 독단적 대응 자체가 쇄신대상이라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향후 변화 여지도 주목된다. 마주보고 달리는 친이계와 박근혜 위원장의 돈봉투 내전 막전막후를 따라가 봤다.
돈봉투 사건을 바라보는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선뜻 작금의 상황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동안 총선 공천 과정의 비리 등과 같은 단순 사건이 하나씩 터지긴 했지만 이번처럼 의원들 이름이 줄줄이, 그것도 전국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장파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동료 선배들 이름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이러다 나도 끌려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쳐가더라. 지금 전개되고 있는 돈봉투 사건은 아무도 그 종착역을 모르는 죽기살기식 서바이벌 전쟁이 돼가고 있다. 옛날 같으면 계파 간 폭로전이 확산되려고 하면 ‘그래도 같은 당인데 너무 하지 않느냐’는 연대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처음부터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같이 다 망하겠다는 식으로 막 터져 나온다. 한나라당의 수명은 이제 다한 것 같다. 짐을 쌀 때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지난 2008년 전당대회에 깊숙하게 관여했던 한나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번 돈봉투 사건의 전말을 나름대로 추리했다. 그에 따르면 “총선 공천에서 떨어져 마땅히 역할이 없던 박희태 국회의장에게 청와대가 ‘그렇다면 당 대표 경선에 나가보라’고 권유하는 게 전당대회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고 싶어서 나선 게 아니라 어찌 보면 등 떠밀려 나간 박 의장으로서는 당연히 당시 최고실세였던 A 의원을 ‘쪼았을’ 것이다. ‘내 돈 써서 선거 치를 수는 없다’고 버티니까 A 의원이 할 수 없이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내줬을 것이다. 정치권 관행상 그 정도의 돈 문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결국 고승덕 의원 파문으로 당이 망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한나라당에서는 지난 대선 때부터 A 의원이 본격적으로 여당의 돈줄을 틀어쥐고 좌지우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그는 자신이 돈을 직접 당기는 것뿐 아니라 중진들에게도 돈을 마련해오라고 압박을 하는 등 ‘컨트롤 타워’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대선 때 이명박 캠프에서 활동했던 한 참모는 A 의원이 한 중진을 ‘쪼았던’ 에피소드를 이렇게 전하기도 했다.
“제법 재력이 있는 한 중진급 의원이 지난 대선 때 소외된 특정지역을 자주 방문했는데 가서 돈도 잘 쓰지 않고 밥도 안사고 해서 그 지역 당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드디어 당원들이 A 의원에게 직접 전화해 불만을 토로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A 의원은 그 중진의원을 향해 ‘당신 개인 돈 10억 원 정도는 써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 실망스럽다’는 취지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중진의원은 ‘괜히 개인 돈을 잘못 썼다가 나중에 탈이 날 수도 있다’며 계속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래서 대선 뒤 그 중진의원은 결국 밉보여 인수위와 정권 초기 권력 핵심에서 멀어졌다고 한다.”
이런 증언을 미뤄 볼 때 A 의원은 자신뿐 아니라 중진 의원들에게도 돈을 만들어 적극 돌릴 것을 독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돈봉투도 그 진원지가 A 의원의 대선 잔금이거나 그에게 ‘쪼임’을 당한 중진들이 갹출한 돈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권력 실세의 ‘부탁’을 거절할 경우 정권 내내 한직에 머물러 있거나 차기 총선의 공천도 보장 못 받는 상황을 우려했을 법한 중진들이 A 의원의 압박을 쉽게 거절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모인 돈은 전당대회가 있을 때마다 권력 실세의 ‘오더’로 변모해 각 지역의 핏줄로 흘러들어갔다. 검찰이 만약 돈봉투 정국에서 나온 각종 증언이나 리스트 등을 모두 확보해 조사할 경우 여기에서 자유로운 의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홍준표 전 대표나 원희룡 의원이 지난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의 치열했던 경쟁을 언급한 것도 은연중 ‘박근혜 위원장도 이런 악의 축에서 혼자 깨끗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8면 기사 참조).
▲ 정두언 의원과 이재오 의원. |
그동안 잠잠하던 소장파도 돈봉투 사건으로 당은 이미 끝났다는 결론을 내리고 재창당 문제를 다시 적극 추진하기로 뜻을 모으고 있다. 정태근 김성식 의원이 이미 탈당해 나머지 소장파의 ‘결심’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두언 의원 등은 이전과 달리 탈당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차차기 대권 후보를 꿈꾸고 있는 원희룡 의원은 탈당에 다소 소극적이지만 정 의원이 결심할 경우 남경필 의원과 그밖에 초선들의 잇단 탈당도 점쳐진다.
소장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최근의 돈 봉투 정국을 대하는 박근혜 위원장의 대응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비대위가 재창당에 대해 분명히 선을 긋고 지금과 같은 어정쩡한 상태로 총선까지 끌고 갈 모양인데 박 위원장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권 교체기에 여당 목을 쥐고 있는 검찰이 총선 전에 계속 관련 의원들을 소환하는 그림을 상상해 보라. 총선 결과는 보나 마나 뻔하다. 비대위가 그 장면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박 위원장이 돈봉투 정국을 탈출할 묘수에 대해 “당 재산을 전부 국민에게 헌납하고 재창당을 해서 길거리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나라당은 지난 2004년 불법 대선자금의 수습책으로 600억원대의 천안연수원을 국민에게 헌납한 바 있다. 이번 사태도 대선자금 정국의 수습책에 버금가는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국민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란 게 앞서의 관계자 지적이다.
그런데 여당 일각에서는 박 위원장의 자기중심적 정치 스타일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가는 곳마다 ‘모두가 변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변화의 중심에서 열외돼 있고,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최근 기자들이 그에게 돈봉투 사건을 질문하자 “(축산농가방문에서) 여기까지 와서 너무 하신다”는 ‘거만한’ 답변 태도가 그 대표적 사례라는 것이다. 한 사무처 당직자는 박 위원장이 돈봉투 사건과 무관하다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두고 “공주라 자기는 다 용서되는 줄 아는 모양”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는 말 그대로 비상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고 의결기구다. 지금 한나라당의 최대 비상은 돈봉투 문제다. 이 핵심을 모른 척하며 “정성과 진심으로 극복하자”는 박근혜 위원장의 대응전략은, 어려운 숙제는 하지 않고 자기 입맛에 맞는 숙제만 해가겠다는 초등학생을 닮았다는 게 일각의 지적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