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 직후 열렸던 2008년 전당대회 당시 사진들. 이명박 정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범 친이계가 힘을 합쳐 박희태 의장을 한나라당 대표로 추대했다. 일요신문DB |
“이재오·이상득 누구 할 것 없이 걸리면 부른다.”
돈봉투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고위 인사의 말이다.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제대로 못하면 우리가 욕먹는다. 정치권에서 뭐라고 하던 성역 없이 수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검찰 수사는 ‘투 트랙’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고승덕 의원이 폭로한 노란 봉투 속 300만 원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안병용 서울 은평갑 당협위원장이 구의원들에게 2000만 원을 나눠주라고 돈 심부름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확인하는 것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두 돈 모두 박희태 의장 선거캠프에서 나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검찰은 박 의장 전 비서 고명진 씨와 안 씨 등을 소환해 이 돈의 출처에 대해 강도 높게 추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검찰은 해외 순방 중인 박 의장이 귀국하는 대로 조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향후 검찰 수사가 박 의장의 전당대회 선거자금으로 확대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검찰 수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지난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박 의장을 당 대표로 밀었던 곳은 이명박 대통령과 이상득 의원이었다. 이 의원과 함께 친이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이재오 의원 측은 안상수 전 대표를 원했지만 청와대가 ‘박희태 카드’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청와대에 협조적인 박 의장을 내세워 당·청 관계를 유리하게 이끌어가고자 하는 의도였다. 정권 초기 차질 없는 국정수행을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한때 박 의장 출마에 반발하던 이재오계와 소장파도 결국 ‘VIP의 뜻’을 받아들여 전당대회에 힘을 보탰다. 이재오계의 한 의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대통령 의중이 박 의장에게 있다는 것을 안 이상 거스를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친박에게 당권을 빼앗기느니 서로 돕는 게 낫다는 판단을 했다. 전략적으로 제휴를 맺은 것”이라고 전했다.
박 의장 선거캠프 구성원들의 면면을 봐도 왜 ‘친이계 연합군’이라는 말이 나왔는지 알 수 있다. 이재오계로 분류되는 최병국 의원(좌장), 김효재 정무수석(상황실장) 등이 캠프를 이끌었고, 주호영 이병석 등 이상득계 의원들은 지역 관리를 맡았다. 정두언 정태근 등 소장파 의원들도 박 의장을 도왔다. 윤호석 정치컨설턴트는 “이명박 정부에서 거의 유일하게 범 친이계가 힘을 합쳤던 선거 아니겠느냐. 임기를 막 시작한 현직 대통령의 ‘오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일단 검찰은 박 의장 선거캠프에 참여했던 이들을 대상으로 돈봉투 사건에 대해 탐문하고 있다. 또한 김효재 수석을 검찰로 불러 “돈봉투를 돌려주자 김효재 수석으로부터 항의전화를 받았다”는 고 의원 진술에 대해 확인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김 수석은 “고 의원과 말 한 마디 나눈 적 없다”며 의혹을 일축하고 있는 상태다. 검찰은 박 의장의 ‘집사’로 통하는 조정만 국회의장 정책비서관이 선거캠프 재정운영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조 비서관 주변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제 검찰 수사는 박 의장이 캠프 운영과 조직 가동 등 전당대회에서 쓴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미 검찰은 2008년 전당대회 직전 박 의장 핵심 측근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계좌에서 적게는 수천만 원 많게는 수억 원이 입·출금된 사실을 발견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 의원이 받았다는 돈봉투와 안병용 씨가 건넨 자금의 출처도 바로 이 계좌들일 것이라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검찰은 이 돈을 박 의장 개인이 조달했을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박 의장 재산 대부분은 부동산이다. 담보대출을 받은 기록도 없다. 따라서 누군가로부터 ‘스폰’을 받은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서 “박 의장에게 흘러들어간 돈의 진원지를 파헤치는 게 수사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박 의장이 공개한 재산내역을 살펴봐도 90억 원대에 이르는 자산 중 현금은 2억 원가량에 불과하다. 돈 선거가 공공연히 행해졌던 2008년 전당대회 당시 박 의장이 돈을 어디서 받았는지에 시선이 모아지고 있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정치권에선 친이계 실세 의원들이 박 의장 캠프에 돈을 댔던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박 의장 대표 만들기’를 진두지휘했던 이상득 의원 쪽을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범친이계가 캠프에 가담하긴 했지만 자금지원 등 핵심역할은 이 의원 측이 했다는 게 현재까지 나온 얘기 중에는 가장 신빙성 있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재오계와 소장파 인사들 역시 “우리가 실무적으로 일을 도와준 것은 맞지만 돈 문제는 잘 모른다. 필요한 경비는 박 의장 보좌진들한테 받아서 썼다”고 입을 모았다.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출마했던 의원실 관계자는 “캠프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활동비를 주는 것은 물론이고 대의원들에게도 봉투를 돌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그러지 않았겠느냐. 자금이나 조직 면에서 박 의장이 월등히 앞섰기 때문에 무난히 당선된 것”이라면서 “박 의장 쪽에서 전당대회 2~3일 전에 대의원들의 차비, 식대 등의 명목으로 200만~500만 원씩 내려보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지역의 한 대의원 역시 “표 단속 차원이다. 모든 지역에 돈을 내려 보내는 게 아니라 확실한 ‘아군’에게만 준다. 말 그대로 밥 사먹고 차 마시는, ‘실비’ 개념이다. 그래도 이게 전국적인 규모다 보니 만만치 않은 액수가 된다. 친이의 조직적 지원을 받았던 박 의장 측이 당선되기 위해서 적어도 40억 원은 썼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박 의장에게 지원된 돈의 성격에 대해 ‘속단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친이계 핵심 실세들이 오르내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부담스러워하는 기류가 역력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과 검찰 안팎에선 2008년 전당대회에 쓰인 돈이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잔여금일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대선 승리 후 7개월 만에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여권 핵심부가 대선에서 모금한 돈의 일부를 ‘투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혹의 끝 역시 이 의원에게로 귀결된다. 대선캠프에서 이 의원을 비롯한 극소수만이 자금을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캠프 출신의 한 여권 전직 관료는 “대선에서 얼마를 썼는지, 또 얼마가 남았는지는 아마 이 대통령보다 이 의원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여권 실세들이 개인적으로 후원을 받아 박 의장을 도와줬다는 주장도 불거졌다. 검찰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체크 중이라고 한다.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대선에서 승리한 뒤 정권 핵심 인사들에게 돈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 기업들이 축하 사례금도 별도로 준비하는 것으로 안다”면서 “특히 총선에서 공천헌금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정치권에서 공공연한 설로만 나돌던 ‘대선승리 축하금’, ‘돈 공천’ 등이 도마에 오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검찰에서도 이러한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고 수사 범위를 넓히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지금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에서 폭로가 줄을 잇고 있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2008년 총선 공천 등에 대한 내용 중 신빙성 있는 것들은 확인을 해 볼 것”이라고 전했다.
청와대는 이 대통령 임기 말에 터진 돈봉투 사건에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김효재 수석의 실명이 공개된 데 이어 검찰의 칼끝이 친이계 핵심들을 겨누는 것에 대해 ‘검찰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이라며 하소연하는 이들도 눈에 띈다. 특히 정치권과 검찰에서 ‘대선자금’까지 거론되자 비상이 걸린 모습이다. 일각에선 한나라당을 향한 불만의 목소리도 들린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집권당 의원들이 막가파식으로 폭로를 하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총선은 물론이고 대선도 어렵다. 이 대통령이 남은 국정을 잘 수행해야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거물급 J 의원 주변 ‘탈탈’
고승덕 의원의 ‘돈봉투 폭로’가 정치권을 뒤덮은 가운데 검찰이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 대해서도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월 12일 시민 두 명이 “한나라당뿐 아니라 민주통합당도 수사를 받아야 한다”며 고발장을 제출한 데 따른 것이다. 고발장에는 민주통합당 아무개 위원장이 지난해 10월 전당대회에서 유권자에게 금품을 건넸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공안 1부에 배당했다. 검찰 관계자는 “일단 한나라당 돈봉투 사건에 주력하고 있지만 수사가 시작된 이상 민주통합당과 관련된 의혹도 확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통합당도 1월 15일 치러진 전당대회를 앞두고 한 후보자가 돈 봉투를 뿌렸다는 소문이 돌자 홍재형 국회부의장을 단장으로 한 진상조사단을 꾸려 조사에 나섰지만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현재 검찰은 민주통합당의 지난해 10월 전당대회와 12월 통합과정에서 열린 임시 전국대의원 대회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당시 후보들이 전국을 돌며 대의원들에게 돈봉투 혹은 명품선물을 뿌렸다는 제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민주통합당의 한 중진 의원은 “A 의원으로부터 70만 원, B 의원으로부터 30만 원을 받았다는 대의원들 진술이 줄을 잇고 있다”면서 “한나라당에서 돈봉투 사건이 터질 때 혹시나 했는데 지금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민주통합당 선병렬 대전 동구 총선 예비후보도 지난 1월 12일 자신의 출마 선언 기자회견에서 “지난번 전당대회에서 후보 15명을 9명으로 컷오프 할 때 (돈 봉투 살포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도 1월 6일 “금품살포를 목격한 바도 경험한 바도 있는데 그 말씀 드리면 다른 정당에 결례가 될 것 같다”며 정치권의 ‘돈선거’를 고백한 바 있다.
한편, 검찰이 최근 민주통합당 거물급인 J 의원 측근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것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지난 1월 11일 수원지검 성남지청은 민주통합당 성남지역 예비후보인 이 아무개 씨의 사무실과 승용차 등을 압수수색했다. 이 씨가 사전선거운동을 벌인 혐의였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검찰의 최정예 부대 중수부 수사관들이 동행했다는 것이다. 또한 압수수색에 나간 인원도 20여 명 수준으로 예비후보의 사전선거운동에 대한 조사치곤 큰 규모다. 검찰 관계자는 “이례적으로 많은 수사관이 압수수색에 참여했다. 또 중수부까지 출동했다. 그냥 흘려버릴 사건은 아니라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 씨가 J 의원 선거캠프와 팬클럽에서 활동했다는 경력을 거론하며 이번 수사가 J 의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