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철수 원장이 한발 한발 현실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민주당에선 안 원장의 선택지가 결국 야권이 될 것이라 낙관한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지난 15일까지 민주통합당(민주당) 임시 공동대표로 활동해 온 원혜영 의원은 최근 출입 기자들과 식사를 겸한 간담회 자리에서 안 원장의 정치 참여, 또 야권과의 결합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외통수란 장기에서 외통장군이 되게 두는 수를 말한다. 외통수에 걸렸다면 아무 데로도 피할 수 없는, 그야말로 옴짝달싹 못하게 된 상황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지난 1980년대 한겨레민주당 창당 멤버로 정치권에 들어와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원 의원의 말에선 경륜 있는 정치인의 자신감이 묻어났다.
“안 교수 같은 지도층 인사가 이 정도까지 왔으면 자기가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되돌아가기는 어렵다. 또 대북문제 공부한다면서 경남대 김근식 교수를 만났다는 것 아닌가. 결국 그렇게 되는 거다.”
이날 원 의원의 발언은 구체적인 팩트에 근거했거나 신중한 분석을 거쳐 나온 것은 아니었다. 한나라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에 맞설 만한 야권 대선주자가 눈에 띄지 않는 상황에서 야권 지도급 인사가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놨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더욱이 이날 간담회는 공식 브리핑 자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맘 편히 얘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하지만 원 의원의 이 같은 발언이 안 원장을 바라보는 민주당 내부의 낙관론을 반영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안 원장 자신은 계속 “고민 중”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결국은 대통령선거가 있는 2012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며, 그의 최종 선택지는 야권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민주당에서 낙관론이 제기되는 첫 번째 이유는 안 원장의 최근 행보가 한발 한발 현실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해석할 만한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8일 미국 방문길에 인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쏟아낸 그의 말들은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정치와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안 원장의 답은 이랬다.
“열정을 갖고 계속 (정치라는) 어려운 일을 이겨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어떤 선택이 의미가 있는가. (국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인가. (내가) 균형을 잡고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정치권의 쇄신 움직임에 대해서도 안 원장은 “선거 때만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해야 진정성이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고 4·11 국회의원 총선거에 대해서도 “많은 것이 바뀌고 좋은 쪽으로 변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내비쳤다. 이전의 ‘비정치적’ 발언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진일보한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방미 기간 중의 행보도 다분히 정치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이었다. 안 원장이 이번에 만난 사람은 구글의 에릭 슈미트 회장과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로 세계 최대 규모 자선재단인 빌&멜린다 자선재단을 운영하는 빌 게이츠 전 MS 회장이었다. 최고 수준의 글로벌 정보기술(IT) 리더들과의 만남 자체로 기성 정치인들과 확연히 차별화되는 안 원장의 면모가 자연스럽게 부각될 수 있었다.
그들과 나눈 대화 내용도 의미심장하다. 슈미트 회장과는 지식정보 기반 산업으로의 혁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고용 없는 성장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폐단 등에 대해 논했다. 게이츠 전 회장과는 세계 경제 전망, 저소득층 구제, 저개발국가 원조, IT 산업 동향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국가 지도자, 글로벌 지도자들에게 어울릴 법한 거대 담론들이었다. 특히 게이츠 전 회장을 만났을 때에는 공동 보도자료를 만들어 배포했다. 단순한 면담 자리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안 원장이 정치에 뛰어든다면 관심은 과연 누구와 함께하느냐로 옮겨간다. 이에 대해서도 민주당 내에선 낙관론이 우세하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부터 안 원장이 내놓은 말과 글은 아주 정제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며 “이는 그가 빈말을 남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말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스스로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한나라당의 확장에 반대하며, 응징해야 한다’는 말을 한 이상 안 원장이 한나라당과 함께 갈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면서 “신당 창당도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결국 남은 선택지는 민주당뿐”이라고 말했다.
안 원장이 최근 김근식 교수 외에도 민주당 김효석 의원과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 연세대 문정인·김호기 교수 등 야권 인사나 야권 성향의 전문가들을 주로 만난 점도 주목받고 있다. 안 원장이 추구하는 가치가 야권의 그것과 맞아떨어진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김근식 교수는 “내가 햇볕정책을 중심으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안 원장은 단 한 번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안 원장은 큰 틀에서 남북화해·협력 정책에 동의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원혜영 의원도 “안 교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소기업과 고용 문제는 큰 틀에서 민주당의 경제민주화 구상과 통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 원장의 향후 행보가 어떠할지 단정하기엔 이르다는 주장도 있다. 시민단체 출신으로 민주당에 결합한 한 인사는 “정치인들은 5부 능선만 넘어도 끝까지 산을 오르게 되지만 비정치인에겐 이런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며 “거의 물가에 온 것 같은데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게 비정치인”이라고 말했다.
한 정치평론가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일부 수긍하면서도 안 원장이 엘리트의 사회적 책무를 매우 중시하는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2012년 한국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국민들의 변화 열망이 ‘안철수의 선택’을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