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이미 몰카·스토킹으로 고소당한 상황…스토킹 범죄 흉흉했음에도 “증거인멸 우려 없다” 구속영장 기각
#메트로넷 접속에서 샤워캡까지…계획 살인?
신당역 살인사건 피의자 전 아무개 씨(31)는 범행 당일인 9월 14일 오후 6시 서울 지하철 6호선 구산역에 ‘고객안전실’에 들어가 자신을 불광역 직원이라고 소개한 뒤 서울교통공사 내부망 메트로넷에 접속했다. 여기서 피해자 A 씨(28)의 현재 근무지가 신당역이라는 점과, 이날 저녁 신당역 근무 일정 등을 파악했다. A 씨는 2022년 1월 근무지가 변경됐는데 전 씨가 메트로넷에 접속해 바뀐 근무지를 파악한 것이다. 전 씨는 이미 직위해제된 상태였지만 여전히 회사 내부망 메트로넷의 접속 권한을 갖고 있었다. 비록 직위해제된 직원일지라도 재판이 끝나 징계 절차가 개시돼야 접속 권한이 박탈되기 때문이다
‘결정적 정보’를 입수한 뒤 전 씨는 흉기를 챙기는 등 본격적인 살인 준비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본인의 동선을 감추기 위해 교통카드 대신 일회용 승차권을 활용했고, 일회용 샤워캡까지 준비해 머리에 썼다. 검거 이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 전 씨가 오래전부터 범행을 계획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경찰 조사에서 “오랫동안 계획하고 범죄를 저지르진 않았다”는 취지로 계획 범죄는 부인했다고 알려졌다. 샤워캡을 쓴 이유 역시 모발이 남는 등 범죄 흔적을 남기기 위함이 아닌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눈에 띄어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14일 오후 8시가 되기 전 신당역에 도착한 전 씨는 1시간 넘게 신당역 역사 내부를 배회했다. 이미 A 씨의 이날 저녁 근무 일정까지 파악한 전 씨는 주로 사건현장인 역사 내 여자 화장실 인근에서 머무르며 A 씨를 기다렸다. 오후 8시 56분 즈음 A 씨가 나타나 화장실 앞에 배치된 순회 점검표를 작성했다. 그리고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자 전 씨가 바로 뒤따라 들어가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
그렇지만 사건이 전 씨의 계획처럼 진행되진 않았다. 우선 흉기에 찔린 A 씨가 화장실에 있는 비상벨을 활용해 도움을 요청했고, 화장실 안에 있던 다른 시민들도 비명을 듣고 신고했다. 결국 전 씨는 역사 직원과 사회복무요원, 시민 등에게 바로 제압당했고, 얼마 뒤 현장에 도착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A 씨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으로 이송된 뒤 약 2시간 반 뒤 사망 판정을 받았다.
#선고 공판 하루 앞두고 피해자 살해
전 씨가 A 씨에 대한 계획 살인을 준비한 까닭은 이들이 이미 피해자와 피의자 관계였기 때문이다. A 씨 측에 따르면 전 씨와 A 씨는 2018년 서울교통공사에 함께 입사하며 서로 알게 됐다. 입사 동기로 어느 정도의 친분만 있는 관계였는데 2019년 11월부터 전 씨의 스토킹이 시작됐다. 300차례가 넘는 전화와 메시지로 만남을 요구하던 전 씨는 2021년 하반기부터 ‘A 씨 관련 영상을 유출하겠다’는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2021년 10월 7일 A 씨는 전 씨를 자신의 모습을 몰래 촬영한 혐의(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위반)로 고소했고, 바로 다음 날 경찰이 전 씨를 긴급체포했다. 이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이 기각했다.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였다. 이후 경찰은 피해자를 신변보호 112시스템에 등록하는 등 안전조치를 한 달 동안 실시했지만 A 씨가 연장을 원하지 않아 한 달 만에 종료됐다.
한편 경찰은 서울교통공사에 전 씨에 대한 수사 개시를 통보했고 이에 따라 전 씨는 10월 13일 직위해제됐다. 그럼에도 전 씨는 문자 메시지 등을 이용한 스토킹을 계속했고 결국 A 씨는 2022년 1월 27일 전 씨를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경찰에 다시 고소했다. A 씨의 2차 고소 당시 경찰은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는’ A 씨에 대해 아예 구속영장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검찰은 2개의 고소 사건을 2022년 2월과 6월에 각각 기소했고, 이 두 사건이 병합된 재판이 서울서부지법에서 계속됐다. 결국 8월 18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전 씨에게 징역 9년을 구형했다. 재판부 선고공판이 9월 15일로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하루 전인 14일 전 씨가 A 씨를 살인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15일로 예정됐던 전 씨의 선고 공판은 연기됐고, 경찰은 전 씨의 혐의를 살인에서 특가법상 보복살인으로 변경하기 위해 보강 수사에 돌입했다.
#뒤늦게 시작된 스토킹범죄처벌법 보완 작업
구속영장 기각 당시 법원의 판단처럼 전 씨는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우려는 없는 피의자였다. 다만 선고공판을 하루 앞두고 피해자를 살인하는 중대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는 피의자임을 법원은 미처 판단하지 못했다. 그것도 스토킹 범죄가 지속되다 살인으로 이어지는 사건이 연거푸 불거지던 2021년에 이뤄진 구속영장 기각이다. 2021년에는 ‘세 모녀 살인 사건’의 김태현을 비롯해 김병찬, 이석준 사건이 연이어 드러났고, 세 사건의 피의자는 모두 신상공개까지 됐다.
15일 저녁 퇴근한 뒤 홀로 신당역 사건현장을 방문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국가가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말을 남겼다. 이에 법무부는 현행 스토킹범죄처벌법의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정부 입법을 통한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특히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스토킹 범죄의 반의사불벌죄 규정을 개정할 계획이다. 피해자와 합의하면 처벌을 피할 수 있다 보니 가해자가 지나치게 합의를 요구하며 피해자에게 2차 스토킹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전 씨 역시 경찰 조사에서 “피해자가 합의해주지 않아서 보복성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16일 오전 “신당역 역무원 스토킹 살인사건 보도가 우리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다”며 “지난해 스토킹 방지법을 제정, 시행했으나 피해자 보호에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법무부로 하여금 제도를 보완해 이러한 범죄가 발붙일 수 없게 피해자 보호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전동선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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