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우승만 13번 기록했던 서능욱 9단은 입단 40년 만인 53세의 나이에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동안 서 9단은 조훈현 9단에게만 결승전에서 12번을 패배했다. |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웃는 서 9단. 그의 일화는 ‘불굴의 의지’가 가져다주는 의미를 새삼 되새기는 계기가 되고 있다. 흑룡이 떠오른다는 임진년 새해를 맞아서 기사처럼 올 한 해를 장식할 각계의 ‘의지인’들을 소개한다. 이들의 감동 스토리와 향후 목표가 희망찬 새해를 여는 촉매제역할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 영화 <똥파리>서 직접 주연을 맡은 양익준 감독. |
당신이라면 살던 집을 당장 내놓고 꿈을 위해 도전할 수 있을까. 여기 전셋집을 내놓고 빚더미에서 만든 첫 작품으로 단숨에 세계적인 영화인으로 우뚝 선 한 청년이 있다. <똥파리>로 ‘천재 감독’의 반열에 오른 양익준 감독(37)이 그 주인공이다. 1700만 원짜리 전셋집을 탈탈 털어 자신이 직접 쓴 극본을 영상화하는 과정에서 양 감독은 숱한 고난과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촬영 중간 스태프 중 절반 이상을 돌려 보내야만 했다. 한순간에 빚더미에 올랐지만 그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종국에는 개봉을 못해도 상관없다는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양 감독의 눈물 섞인 의지는 결국 빛을 발했다. 로테르담, 도빌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20여 개의 상을 휩쓴 것이었다.
하지만 천재만의 예민함이 불러일으킨 부작용일까. 최근 영화계에서 양 감독이 자취를 감췄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양 감독이 안면근육장애와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러나 기자가 직접 통화해보니 양 감독은 단순히 휴식이 필요했던 것일 뿐 건강상의 문제는 없어 보였다. 여러 차례 통화에서 기자는 그의 천재성과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뚝심을 엿볼 수 있었다.
영화계의 한 관계자는 “임진년에 양 감독이 또 어떤 작품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지 기대된다”며 양 감독을 기다리는 많은 영화인들의 바람을 전해왔다.
# 모의고사 성적 평균 24점
“사람들에게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문을 연 조 씨는 인터뷰 내내 겸손한 모습이었다. 그는 “시급 900원 받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편의점,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까지 수학 50점을 넘어본 일이 없다”고 회고했다. 그랬던 조 씨에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간에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한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유명 패스트푸드점에서 1년 반 동안 일했는데도 시급이 50원밖에 안 올랐던 것이다.
그는 순간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렇게 살다가는 나중에도 돈 몇 푼 못 벌고 빌빌대며 살겠구나’하는 생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위기감을 피부로 절감한 조 씨는 고3이 돼서야 처음으로 모의고사를 치렀다. 당시 성적은 평균 24.4점. 대학에 발을 디딜 수조차 없는 처참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의지를 불태우며 하루 4시간만 자고 공부를 했다. 그런데도 결과는 시원찮았다.
조 씨는 “가끔 TV에서 꼴찌였다가 열심히 1년간 노력해서 서울대 갔다는 사람들의 일화가 나오는데, 평범한 나에게는 그런 기막힌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난 평범했다”고 회고했다. 조 씨는 삭발 후 2년간 더 공부했지만 노력만큼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군에 입대한 그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불굴의 의지를 다진 끝에 휴가 중 수능을 쳤다. 삼수 끝에 좋은 점수를 받고 동국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 후에도 그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배우고 싶은 게 많아 필요한 책들도 많았고 대학원 진학까지 고려하다보니 돈이 필요했다. 이에 조 씨는 택시기사 자격증을 땄고 곧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그는 대학 4년 내내 저녁 7시까지 수업을 듣고 밤 10시까지 도서관에서 복습을 마친 후 새벽 4시 무렵까지 대리운전을 했다. 당시 조 씨의 지인들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웬만한 사람이라면 유혹 많은 20대 초반에 4년간이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에 일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조 씨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손님이 생기면 곧바로 달려갔다. 문제는 강남 쪽에서는 내가 접해보기 힘든 고급차를 모는 손님이 많았다”며 “혹시라도 대리운전 시 손님 차를 상하게 할까봐 주말에는 발레파킹 아르바이트도 겸해서 했다”고 말했다. 발레파킹을 하다보면 다양한 차종을 운전할 기회가 생기기 때문에 좀 더 손님의 차를 안전하게 몰 수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에서였다.
대리운전 하나에도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던 덕에 단골도 늘었다. 대리운전을 하는 평균 연령대는 일반적으로 40대 중반 선이다. 동료 대리 기사들은 거의 아들뻘인 조 씨를 바라보며 “정말 대리 운전하는 것 맞느냐. 어쩌다 이렇게 됐느냐”며 걱정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알게 된 한 동료 기사는 “내 아들과 동갑인데 어쩜 이렇게 다르냐”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대리운전하고 공부하느라 제대로 놀 시간도 없었지만 이렇게 모은 돈으로 훗날 더욱 심도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 씨는 힘이 절로 났다.
계획적인 습관 덕인지 성적도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대학 8학기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대학원 진학 당시 전체 수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신기하더라고요. 어디 가서 1등한 적이 없었는데…”라고 담담히 읊조리던 조 씨는 몇 년 전 이공계 출신의 꿈이라는 포항공대 대학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포항공대 대학원은 국내에서 가장 입학하기 어려운 대학원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대학원에서의 재밌는 일화를 소개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가끔 회식 후 교수님들 차를 대리 운전해드렸다. 주차 실력에 다들 놀라시더라”며 웃어보였다. 최근 조 씨는 대학원 졸업 후 국내 유명 대기업에 입사가 확정됐다고 한다.
그는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대체할 수 없는 인력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뭐든지 꿈을 갖고 노력하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거대 제약회사와 맞짱
전 변호사는 아무도 맡지 않는 이 사건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를 돕고 싶다는 의지는 그로 하여금 밤잠을 줄여가며 피해자들을 설득하게 했다. 까다로운 소송에 휩싸이기 싫어 발 빼기 바쁜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는 데에도 만만찮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당시 사건 자문을 맡았던 아무개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건을 맡았던 전현희 변호사는 반드시 승소해야 정의가 산다며 인지대도 받지 않고 2심 소송을 진행해 줬다”며 “헌신적으로 노력한 전 변호사 덕분에 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기적처럼 승소를 했다”고 말했다. 결국 전 변호사의 노력이 통했는지 대법원은 제약사가 승소한 2심 판결을 뒤엎고 환자의 손을 들어줬다. 2003년 손해배상 소송이 시작된 지 8년 만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전 변호사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법조인으로서 언제나 어려운 분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 결과물이 (녹십자 소송) 승소로 이어진 것 같다”고 겸손해하면서도 “정치도 좀 더 넓은 범주에서 구체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지 녹십자 소송에서 배웠던 불굴의 정신을 잃지 않고 어려운 계층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