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수는 명장 안된다? 롤러코스터 탄 선동열, 명예회복 한 홍명보
이승엽 감독은 1995년 데뷔부터 2017년 은퇴까지 선수로서 갖가지 기록을 쌓아 올렸다. KBO리그에서 정규시즌 MVP 5회, 한국시리즈 MVP 1회, 홈런왕 5회, 골든글러브 10회 수상에 성공했다. 이외에도 안타, 타점, 득점, 장타율, 출루율 등 각종 부문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통산 기록에서도 은퇴 이후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통산 2루타(464개), 홈런(467개), 타점(1498개) 등 각 부문 통산 1위는 여전히 이승엽 감독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KBO리그 최고 스타로 군림하던 국민타자의 감독 생활은 어떨까. 감독으로서 첫 시즌을 앞두고 기대와 의심이 공존하는 상황이다. 지난해까지 두산은 7시즌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다 올해 정규리그 9위에 그쳤다. 전력이 약화된 두산을 맡아 신임 감독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반면 조금의 성적만으로도 비판을 피할 수 있다는 낙관론도 있다.
스포츠계에선 종목을 막론하고 '스타플레이어는 명장이 될 수 없다'는 격언이 있다. 수많은 사례들을 돌아보면 이는 때로 일치하는가 하면 격언을 뒤집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첫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하는 이승엽 감독의 앞으로 모습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KBO리그 40년 레전드 1위의 불명예 퇴진
2022년 KBO는 리그 창설 40주년을 맞아 레전드 40인을 발표했다. KBO 경기운영위원회, 현역 단장, 감독, 선수, 언론이 선정에 참여했고 팬 투표도 진행됐다. 40년 역사의 레전드 1위(이승엽 감독은 4위)로 꼽힌 인물은 '국보급 투수' 선동열이다.
투수 선동열은 압도적 기록을 가진 선수였다. KBO리그 통산 367경기에 나서 146승 40패 132세이브를 달성했다. 평균자책점은 겨우 1.20. 1647이닝을 소화하며 탈삼진 1698개를 잡아냈다. 그러면서 홈런은 28개만 허용했다.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는 101.29로, 투수부문 2위(69.07)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1999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현역 은퇴를 한 선동열 감독은 2004년부터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로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듬해 곧장 감독으로 승격됐고 2년 연속 정규리그 1위,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2005~2010년 6년의 재임기간 동안 2009년을 제외하면 꾸준히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성과를 냈다.
삼성에서 감독 생활을 하는 동시에 국가대표팀을 오갔다. 대표팀이 4강 진출에 성공한 2006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투수코치를 맡아 투수 운용과 관련해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삼성에서 물러난 이후 2012시즌부터는 친정팀 KIA 타이거즈의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3년간 줄곧 하위권에 머물렀다. 3년 차 시즌이 끝난 이후 팀은 선 감독에게 재계약을 안겼으나 팬들의 극심한 반발이 있었다. 결국 악화된 팬심에 선 감독은 자진사퇴를 결심했다.
프로야구 현장은 떠났지만 대표팀 코치로 다시 나서며 2015 프리미어12 우승에 기여했고 2017 WBC 대표팀에도 합류했다. 특히 프리미어12 우승 당시 투수 운용은 호평이 이어졌다. 2017년 전임감독 체제를 천명한 야구 대표팀의 초대 전임감독으로 선임됐다. 이전까지 감독직을 놓고 골머리를 앓아오던 대표팀은 전임감독제 실시 이후 첫 주인공으로 '국보급 투수'를 모신 것이다.
전임감독 선동열은 주요 과제였던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메달 획득 과정에서 호된 질타를 받았다. 대회 첫 경기, 다수의 실업 선수로 구성된 대만에 패한 것이 팬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선수 구성과 관련해서도 군 미필 선수를 안배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대회 이후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서는 등 굴욕을 겪었다. 결국 최초 임기였던 4년을 채우지 못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선동열 감독과 함께 레전드 40인에 선정된 다수 스타 출신들이 지도자 생활을 했음에도 1군 감독을 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비춰보면 KBO리그 1군 감독에 이어 국가대표 감독까지 지냈다는 점에서 선동열 감독은 영광을 누렸다고 볼 수 있다. 선 감독에 이어 2위로 선정된 고 최동원 역시 마찬가지며 3위 이종범 감독은 10여 년간 코치 생활 끝에 LG 트윈스 2군 감독을 맡고 있다.
레전드로 선정된 인물 중 일부는 감독직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선수로서 성공적 커리어를 보냈지만 지도자로선 명암이 공존한다. 이들 중 현재까지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내고 있는 지도자로는 이강철 KT 위즈 감독(레전드 40인 9위)이 있다. 2006년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10년이 훌쩍 넘은 2019년에야 사령탑에 오른 이강철 감독은 부임 3년 차인 2021시즌 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2015시즌부터 1군에 참가한 ‘막내구단’을 이끌고 우승을 일궜다는 점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외에도 스타플레이어 출신으로 성공적인 지도자 생활을 했던 인물로는 KBO리그 4회 통합우승을 달성한 류중일 감독이 꼽힌다.
#명예회복 성공한 ‘축구영웅’ 차범근·홍명보
축구 종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타 출신 지도자는 차범근 감독과 홍명보 감독이다. 둘은 나란히 A매치 136경기에 출전해 국내 최다 출전 기록을 갖고 있다. 차 감독은 58골로 최다득점 기록을 갖고 있으며 한국인 선수로선 최초로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신화를 썼다. 홍 감독은 프로 데뷔와 동시에 리그 MVP를 차지했고 국가대표로서 4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 월드컵 4강이라는 업적을 이뤘다.
당대 최고 스타였던 이들은 현역에서 물러난 이후 빠르게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차범근 감독은 1991년 현대 호랑이(현 울산 현대) 지휘봉을 잡고 4년간 팀을 이끌었으나 첫해 준우승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1994시즌을 마치고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다. 후임 고재욱 감독은 리그 우승(1996)을 달성해 대조를 이뤘다.
현대에서 물러난 차 감독은 1997년 1월 대표팀 감독에 부임했다. 2002 한일 월드컵 유치로 축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시기, 차 감독은 부임 직후부터 평가전, 1998 프랑스 월드컵 예선에서 호성적을 냈다. 월드컵 본선 진출을 조기에 확정 지으며 국민적 성원을 받았다. 숙적 일본을 상대로 적지(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일궈낸 역전승은 '도쿄대첩'으로 불리며 현재까지도 회자된다.
하지만 차 감독의 '영광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큰 기대를 받고 나선 월드컵 본선에서 연패를 당하며 대회 중 경질되는 초유의 불명예를 겪었다. 이후 차 감독은 승부조작 등 한국 축구의 어두운 면을 폭로했고 축구협회로부터 자격정지 징계를 받아 국내 축구계와 멀어졌다.
해설위원 활동 등을 이어가던 차 감독은 2004년 수원 삼성 지휘봉을 잡으며 10년 만에 K리그 무대로 복귀했다. 2010시즌 초반 부진한 성적에 자진 사퇴로 팀을 떠났지만 약 6년 반의 재임 기간 동안 리그 우승 2회, 준우승 1회, FA컵 우승 1회 등을 달성하며 국가대표에서 무너진 자존심을 세웠다.
홍 감독도 차 감독과 같은 듯 다른 길을 걸었다. 선수시절 한국 축구의 상징이었던 그는 은퇴 직후부터 A대표팀 코치를 맡았다. 당시 홍 감독은 지도자 라이선스가 없었기에 이를 놓고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각급 대표팀 코치를 거치고 해외 연수를 경험한 홍 감독은 2009년 U-20 대표팀을 맡으며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같은 연령대 선수들과 함께 U-23 대표팀까지 맡아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이라는 성과를 냈다.
승승장구하던 지도자 홍명보의 전성기도 오래 가지 못했다. 흔들리던 A대표팀의 소방수로 투입됐고 2014 러시아 월드컵에서 1무 2패로 실패를 맛봤다. 홍 감독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고 대한축구협회가 월드컵 이후 유임을 발표했으나 홍 감독이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재기를 위해 중국 슈퍼리그 항저우 그린타운 감독직에 올랐으나 팀이 2부리그로 강등되자 불명예스럽게 팀을 떠났다. 이후 현장을 떠나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로 행정가 생활을 하던 그는 2021시즌을 앞두고 울산 현대 지휘봉을 잡으며 커리어 최초 K리그 감독을 맡았다. 부임 첫해 준수한 성적을 거뒀지만 리그 준우승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2년 차 시즌에는 팀의 염원이던 우승을 달성하며 과거 감독으로서 불명예 그림자를 걷어내는 데 성공했다.
#'농구 대통령'의 추락
대한민국 농구에서 역대 최고로 꼽히는 인물은 '농구대통령' 허재다. 다른 종목 스타들과 달리 해외 무대 활약은 없었지만 실업 시절부터 프로 출범까지 관통하는 농구계 최고 스타임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2004년 은퇴 이후 지도자 연수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던 허 감독은 연수 기간 1년을 채우기도 전에 전주 KCC의 부름을 받고 감독 직함을 달았다. 만 40세, 코치 경험 없이 곧장 감독으로 임명된 당시 인사는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허재 감독은 KCC 한 구단에서만 10시즌간 감독직을 지냈다. 부임 초기 가능성을 보이던 그는 리빌딩을 단행, 2008-2009시즌 우승에 성공했고 다음 시즌 준우승, 2010-2011시즌 또 다시 우승을 달성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KCC에서 마지막 3년은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실패했지만 통산 2회 우승을 달성한 감독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허재 감독은 지도자로서도 '농구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KCC에서 퇴진 이후 야인 생활을 하던 허 감독은 2016년 전임감독체제로 전환한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이전에도 이따금씩 대표팀을 맡았으나 전임감독으로서 첫 취임은 상징적인 발걸음이었다. 부임 초기 호평이 잇달았다.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아컵에서 3위에 올랐고 호쾌한 경기력이 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농구 월드컵 지역 예선도 순항 중이었다.
하지만 야구대표팀의 선동열 감독과 같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이 허 감독의 발목을 잡았다. 허 감독은 대회 전부터 두 아들(허웅, 허훈)을 모두 대표팀에 발탁해 논란을 빚었다. 동메달이라는 결과가 나오자 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폭발했다. 허웅·허훈 형제는 MVP를 수상하는 등 리그 최고의 선수지만 당시는 현재의 '스텝업'을 이루기 전이라 논란이 뒤따랐다. 허 감독은 기존 임기였던 2019년까지 팀을 이끌지 않고 조기 사퇴를 결정했다. 불명예 퇴진 이후에는 별도의 지도자 생활 없이 방송인으로서 활동을 이어가다 최근 고양 캐롯 점퍼스의 대표이사로 농구장에 돌아왔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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