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피아니스트>로 황금종려상을 차지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 미국 아카데미 감독상에도 선정됐지만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은 혐의로 도피 중인 탓에 참석하지 못했다. EPA/연합 |
이때 그는 프랑스의 패션 잡지 <보그옴므>로부터 화보를 촬영해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콘셉트는 어린 소녀들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었고, 이때 그는 서맨더 게일리(지금은 서맨더 게이머)라는 13세 소녀를 알게 된다. 그와 서맨더가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해선 수많은 설이 있다. 소녀의 어머니인 수잔 게일리가 폴란스키와 내연 관계였다는 설, 존 휴스턴 감독이 소개해줬다는 설, 소녀의 언니의 남자친구와 폴란스키가 친분이 있어서 소개를 받았다는 설 등등. 아무튼 서맨더는 로만 폴란스키와 만났고 그녀의 어머니에겐 딸을 연예계로 진출시키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그는 긴장을 풀라며 서맨더에게 샴페인을 따라 주었고 진정제를 주었다. 자쿠지(기포가 생기게 만든 욕조) 밖에서 누드를 찍었는데, 이후 법정에서 서맨더는 당시 “노출 때문에 예민해졌고, 천식 증세가 오고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폴란스키는 서맨더의 그곳을 입으로 애무했고 애널섹스를 했다. 서맨더는 저항하지 않았는데, 판사 앞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그랬다고 밝혔다. 집으로 돌아간 서맨더는 남자친구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전화로 이야기했는데, 통화 내용을 엿들은 언니가 어머니 수잔에게 말했고 그녀는 경찰에 신고했다. 그날 자정에 서맨더는 병원에서 성 관계 유무를 검사했다.
다음날 폴란스키는 경찰 조사를 받았다. 그의 방에선 인화되지 않은 필름과 진정제가 발견됐다. 그는 2500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경찰서에서 나왔지만 곧 기소됐다. 총 여섯 가지 죄목이었다. 미성년자에게 약물 제공, 미성년자에게 외설적이고 음탕한 행동 요구, 미성년자와 불법적인 성행위, 약물을 이용한 강간, 미성년자에게 오럴섹스 같은 변태적인 성행위 그리고 애널섹스 요구. 폴란스키는 소녀가 섹스를 거부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이것은 그의 지나치게 자유로운 가치관이었다. 동의했더라도 미성년자였다는 게 문제였던 것. 한편 컬럼비아는 연출 제의를 철회했고 <보그옴므>도 아직 정식 계약 전이라며 발을 뺐다.
1977년 8월 9일. 그날은 아내 샤론 테이트의 8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폴란스키는 이른바 ‘셀러브리티 법정’으로 불리던 산타모니카 상급 법원에 출두했다. 사건을 맡은 로렌스 J. 리텐밴드 판사는 할리우드 스타들의 사건에 관심이 많았고, 이미 여러 건의 ‘스타 사건’을 통해 이름을 알린 바 있었다. 폴란스키에겐 불법적 성관계만 인정하면 다른 부분은 묻지 않겠다는 ‘딜’을 시도했지만 폴란스키는 이를 거부했다.
9월 19일 리텐밴드 판사는 주립 교도소에서 90일 동안 심리 치료를 받을 것을 명령하면서, 단 영화 촬영을 위한 3개월은 허용했다. 당시 폴란스키는 <허리케인>라는 영화의 연출을 제안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일이 터졌다. 리텐밴드 판사가 신문에서 독일의 옥토퍼페스트에서 미녀들과 함께 있는 폴란스키의 사진을 보게 된 것. 10월 24일에 판사 앞에 불려 온 폴란스키는 영화 펀딩을 위해 독일에 간 것이고 축제 기간에 사람들을 만났으며, 사진 속 미녀들은 주최 측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판사는 그를 교도소에 수감시켰고 폴란스키는 42일 만에 나온다. 이때 판사는 그에게 “자발적으로 미국을 떠나지 않으면 강제로 쫓아낼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폴란스키는 그 길로 비행기를 타고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34년 동안 미국 땅을 밟지 않고 있다.
2009년 취리히에서 체포되어 가택 연금 상태에서 지내다 풀려난 폴란스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그때의 일을 30년 넘게 후회하며 살았다”고 밝혔지만, 당시 미국 사회와 사법부도 그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다. 그는 마치 먹기 좋은 먹잇감 같은 이방인이었고 판사는 극도의 편견을 지닌 채 판결을 내렸다.
이후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피아니스트>(2002)에 감독상을 수여함으로써 할리우드는 그를 용서했고, 사건의 당사자였던 서맨더 게이머도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렇지만 폴란스키는 아직도 과거의 상처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영혼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