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17일 오전 08시 06분 오피러스 차량이 서울 중구 장충동 이재현 CJ그룹 회장 자택 인근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이 회장 자택 폐쇄회로(CC)TV에 촬영됐다. |
CJ에서 미행자로 지목한 사람은 삼성물산 감사팀 소속 김 차장이다. ‘삼성’이라는 이름을 넘어 감사팀 소속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의심을 살 만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삼성이 이재현 회장을 미행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제 막 경찰 조사가 시작된 터라 정황이 그렇다는 것일 뿐 확정할 수도 없다. 또 삼성은 물론 김 차장 역시 ‘미행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CJ는 삼성이 이재현 회장을 미행한 것이 명백하다는 증거로 관련 사진과 CCTV 영상 등을 공개했다. 삼성은 “경찰조사에서 밝혀질 것”이라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 건과 겹쳐 있는 때여서 맞대응하면서 사건을 더 크게 벌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의미일 수 있다.
과연 어느 쪽 말이 진실인지 지금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재계에서는 여러 정황과 근거로 봤을 때 ‘미행당했다’는 CJ 쪽 주장에 더 무게를 싣고 있다. 관련 사진과 CCTV, 그리고 미행자가 차를 교체했다든지, 이재현 회장의 저녁 약속 자리까지 따라왔다든지 하는 CJ 쪽 주장과 논리가 더 설득력을 얻기 때문이다.
CJ는 이번 사건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라 이건희 회장 지시에 따른 삼성의 조직적인 미행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삼성물산, 그것도 감사팀 소속 직원이 미행을 했다는 것은 도저히 개인적인 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CJ가 삼성의 공식사과와 재발방지책을 요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삼성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근거 중 또 하나로 CJ 측은 “미행자가 여러 명일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귀띔했다. CJ 관계자는 “자체적으로 살펴본 결과 의심되는 차량이 여러 대였다”며 “미행자도 여러 명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 쪽은 신라호텔 부지에 대한 사업성을 검토하기 위해 오갔다는 김 차장의 말을 빌려 여러 명이 조직적으로 미행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게다가 미행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단지 ‘직원의 개인적인 업무’라는 것.
지난 23일 CJ는 서울중부경찰서에 김홍기 그룹 비서팀장의 이름으로 ‘삼성’을 고소했다. 미행자로 지목한 김 차장을 피고소인으로 하지 않고 피고소인란에 ‘성명불상’으로 기재함으로써 이번 미행에 삼성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한편 향후 사태가 더 확대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CJ 관계자는 “고소장을 제출한 이상 경찰 조사에 맡길 것”이라며 “증거 사진과 동영상 등 자료를 제출했으니 할 만큼 했다”고 말했다. 삼성 쪽은 경찰 수사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 ‘장자 소송’과 관련 있나
CJ는 지난 20일 미행 차량이 이 회장의 차량을 CJ빌딩뿐 아니라 저녁 약속 장소까지 따라붙었다고 주장한다. 또 21일에는 미행자가 차량을 교체하는 것도 목격했으며 이를 증거사진으로 공개하기도 했다.
CJ가 파악한 바로는 미행이 시작된 것은 지난 15일. CJ는 미행 사실을 20일에 알았으며 21일에는 추가 사실도 확인했다. 일각에서는 CJ가 미행 사실을 간파하고 나서도 당장 신고하지 않고 하루가 지난 뒤 언론에 먼저 공개한 후 경찰에 갔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왜 당일 바로 발표하거나 신고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를 두고 ‘유리한 입장을 선점하기 위한 CJ의 계획적인 행동’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CJ 관계자는 “사건을 발견하고 난 뒤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여러 가지 대책을 검토한 것”이라며 “고민의 시간으로서 하루 이틀은 결코 길지 않다”라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CJ가 미행을 간파한 사실을 늦게 공개한 까닭은 무엇일까. 재계 한편에서는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소송이 생각보다 크게 부각되지 않고 CJ에 유리하게 돌아가지도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CJ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면밀히 계획했을지 모른다는 분석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분석의 저변에는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에 CJ와 이재현 회장이 관련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깔려 있다. CJ에서는 이 전 회장의 소송에 대해 시종일관 “우리와 관계없는 일”이라며 “중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다 한다”고 밝혔지만 실은 진작부터 CJ와 이재현 회장이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 건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해석이다.
재계 관계자는 “소송의 발단이 된 상속재산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이건희 회장의 문서가 이맹희 전 회장이 아닌 CJ 재경팀으로 전달됐는데 CJ와 이재현 회장이 몰랐을 리 있겠느냐”고 말했다. 재계 또 다른 관계자는 “만약 그렇다면 CJ가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 건에 대해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오래 전부터 전략적으로 준비해왔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보탰다. 실제로 이 같은 정황도 일부 드러났다.
TV조선 보도에 따르면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대리인이 소송을 내기 직전 CJ그룹 법률팀장 양 아무개 변호사와 함께 동행해서 이 전 회장을 만나고 온 것으로 확인됐다. 두 사람은 중국 현지에서 이 전 회장과 수임 건을 논의한 뒤 소송 위임장을 받아 팩스를 통해 국내로 전송했고, 그날 오후 서울중앙지법에 전자접수했다고 이 매체는 밝혔다. CJ그룹 법률팀장이 단독플레이를 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양 변호사가 그룹 최상부와 교감하고 진행했을 것으로 보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 전 회장의 소송과 이번 미행 사건에 대해서는 CJ도 할 말이 많다. 이 전 회장의 소송으로 불안해진 삼성이 오히려 이 전 회장의 소송 때문에 이재현 회장을 미행했다는 것. 이러한 점은 특히 이 전 회장이 소송을 제기한 직후부터 미행이 이뤄졌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CJ 측은 “미행 사건이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과 연관돼 있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상태다”라고 말했다.
# 숙질 전쟁 ‘루비콘’ 넘었나
이번 미행 사건은 삼성과 CJ의 갈등을 또 다시 수면 위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삼성과 CJ의 갈등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삼성과 CJ는 넓게는 형제 사이, 직접적으로는 숙질(삼촌-조카) 사이다. 그럼에도 두 재벌은 서로 불미스러운 일이 잦았다.
둘 사이에 벌어진 사건의 크기와 사회적 파장도 상당했다. 굵직한 일만 대략 떠올려 봐도 지난 1995년 CCTV 설치 사건, 지난해 대한통운 인수전 격돌이 있었고, 최근엔 지난주 터진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 건이 있다.
경찰 고소까지 이어진 미행 사건으로 삼성과 CJ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이 파일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서는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 사건을 원만히 마무리하면서 삼촌과 조카 사이가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미행 사건으로 분위기가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로 확 바뀌었다. 오히려 미행 사건이 이 전 회장의 소송과 연결되면서 새삼 소송 사건에 대한 관측과 해석이 더 다양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두 재벌 사이의 해빙무드가 지금으로서는 요원해 보인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