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수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이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이자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인 홍라희씨. 그는 성공한 미술경영자이자 국내 최고 재벌의 부인이고 해방 이후 최근까지 국내 정·관계를 관통하고 영남인맥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일요신문>은 새해 시작되는 ‘재계 파워우먼’ 첫 번째 순서로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을 선택했다. 그가 단순히 재벌부인이 아니라 성공한 여성 미술경영자이고 향후 재계 흐름의 한가운데에 위치할 여성CEO라는 점에서 첫 번째에 올린 것이다.
그는 리움 관장이자 재단법인 아름지기 이사, 사단법인 현대미술관회 회장, 사단법인 남북어린이어깨동무 이사 등 미술계와 사회복지분야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홍 관장이 이건희 회장가에서의 점하고 있는 위치를 보면 그를 단순히 사회사업가나 그룹의 부(富)로 뒷받침한 미술경영자로만 볼 수는 없다. 특히 지난 11월18일 이건희 회장의 막내딸 윤형씨가 사망하는 삼성가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뒤 홍 관장의 움직임은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졸지에 딸을 잃은 이 회장의 건강 상태가 사건 이후 더욱 나빠졌다는 얘기가 나돈 뒤 더욱 그렇다. 홍 관장은 실제로 윤형씨의 장례를 현지에서 치른 직후 11월 말께 윤형씨의 유골을 안고 극비리에 귀국해 국내에서 산골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무렵 홍 관장이 오랫동안 다녀온 서울 혜화동 원불교 원남교당에 윤형씨의 빈소가 차려지고 49제가 시작됐다. 홍 관장은 당시 그 사건으로 앓아 누운 친정어머니 김윤남씨(82·족보명 김윤탁)를 위로하고 바로 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미국에 치료차 머물고 있는 남편 이건희 회장의 건강을 염려해서다. 이처럼 홍 관장은 위기 상황에서 친정 홍씨 가문과 시댁 이씨 가문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홍 관장의 아버지는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씨다. 홍진기씨는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평생 사업 파트너라고 불렀던 인물로, 현 중앙일보 오너인 홍석현 전 회장의 부친이다.
즉 홍 관장은 영남 파워인맥의 정점이자 해방 이후 형성된 국내 재벌 인맥의 정점, 국내 언론계 오피니언리더 그룹의 세 꼭지점이 만나는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라는 얘기다.
지난해 여름 대한민국은 삼성 엑스파일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그 스캔들의 한 갈래는 삼성이 검찰에 명절 때마다 떡값을 돌려 ‘삼성장학생’을 관리한다는 얘기였다.
당시(8월18일) 이와 관련해 이름이 거론되던 김상희 차관은 사표를 내며 “삼성이나 중앙일보 홍석현 전 회장에게 어떤 명목으로도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밝히는 등 억울함을 호소했다. 홍 전 회장은 김 전 차관의 고종 6촌형으로, 김 전 차관의 증조할아버지 김은호씨가 바로 홍 회장의 외증조할아버지다.
경남 산청이 본거지인 경주 김씨 수은공파 김은호씨의 종손자는 김두희 전 법무부 장관이고, 김 전 차관은 김은호씨의 둘째 아들쪽 후손이다. 김두희 전 장관의 매제는 김경림 전 외환은행장이고, 김 전 장관의 고종사촌으로는 성균관대 언론대학원장을 지낸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 등 박사와 교수, 의사가 즐비하다. 김 전 차관의 발언은 인척인 삼성의 이씨 가문이나 홍씨 가문에서 돈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한 것이다.
주목할 만한 인맥은 김은호씨의 셋째 아들 김신석씨쪽 후손. 김신석씨는 부산상고를 나와 식산은행(산업은행) 두취(총재)를 역임한 뒤 호남의 대부호인 현준호씨(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조부)가 설립한 호남은행 책임자로 활동한다.
산청사람이던 김신석씨는 그때 호남으로 생활 본거지를 옮겼고 슬하의 두 자녀 김홍준, 김윤남도 호남에서 자랐다. 원불교 신자가 된 것이나 영남 인맥임에도 김윤남씨가 전라도 사투리를 배운 것도 바로 이런 배경과 관련이 있다. 키가 크고 미모가 빼어났던 김윤남씨는 전남고녀를 졸업한 뒤 이화여전 가사과로 진학했다.
경성제대 법학과를 나왔지만 왕십리에 살던 가난한 수재였던 청년 홍진기는 전차에서 우연히 마주친 김윤남씨에게 한눈에 반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진기-김윤남 커플은 국내 영남인맥의 한 정상을 이루게 된다.
홍진기씨 그 자신이 법무부와 내무부 장관을 지냈고, 첫딸 라희씨가 대구를 기반으로 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셋째 며느리가 되었다. 장남 석현씨는 전 중앙일보 회장, 차남 석조씨는 광주고검 검사장, 삼남 석준씨는 삼성SDI 부사장, 사남 석규씨는 보광그룹 회장, 막내딸 라영씨는 삼성문화재단 상무 등으로,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가문으로 발돋움했다. 뿐만 아니라 홍진기씨는 혼사를 통해 영남-관계-재계 인맥의 한가운데로 홍씨 가문을 끌어 올렸다.
홍진기씨의 큰며느리 신연균씨는 3공화국 시절 법무부 장관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신직수씨의 딸이고, 둘째 며느리는 3공 시절 서울시장을 지낸 양택식씨의 동생 양기식씨의 딸 경희씨다. 또 막내딸 라영씨의 시아버지는 5~6공의 대표적인 관료였던 노신영 전 총리이기도 하다. 지난 여름에는 홍 관장의 외삼촌 김홍준씨의 손자와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의 딸이 혼사를 맺기도 했다. 범 홍씨 가문의 외연이 자꾸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재계 일각에선 홍진기씨의 후원과 교육이 있었기에 이병철 회장의 삼남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 2대 총수에 오를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홍진기 회장의 인맥은 삼성과 이건희 회장 체제의 보이지 않는 힘이 됐다.
삼성은 지난 87년 이병철 회장의 타계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이건희 회장 체제의 안착을 위해 신현확-김준성-김만제씨 등 영남 출신 전직 총리, 부총리를 영입해 과도기의 ‘외풍’을 막으며 권력 전환기에 찾아올지도 모를 ‘외부 리스크’를 줄여나갔다. 이후 92~93년부터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 선언을 하는 등 본격적인 이건희 시대가 열리게 됐다.
이런 이건희 체제의 출범기 때를 비추어 보면 홍라희씨의 역할이 단순히 안주인 역할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딸의 사망 이후 이건희 회장의 건강이 부쩍 안 좋아졌다고 삼성 측은 말한다. 때문에 재계에선 일단 유사시에 대비해 홍 관장의 역할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실제로 삼성가의 주력기업 삼성전자의 지분을 자신 명의로 갖고 있고, 삼성가 인맥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영남인맥의 정점에 있는 데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호남에서 성장한 경험이 있다. 게다가 며느리로 대표적인 호남재벌의 딸을 점찍어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는 김영삼 정부 이후 3공의 파워인맥이 끊어진 정·관계 파워인맥도에서 홍 관장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삼성이라는 거대 권력을 이양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이재용 상무의 가장 큰 지원자는 아버지 이건희 회장과 어머니 홍라희 관장이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태평양을 넘나들며 이 회장과 이 회장 이후를 대비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홍 관장일 수밖에 없다.
홍라희 관장이 단순한 미술관장이 아닌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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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