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3월 국내 백화점에 처음으로 입점한 하이얼 제품을 소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 ||
최근 국내 가전업계의 가장 큰 이야깃거리는 중국 가전업체 하이얼과 관련된 것들이다. 하이얼은 이미 초저가 정책을 무기로 삼아 TV홈쇼핑과 할인점을 통해 국내시장에 둥지를 틀었다. 올 한해 하이얼이 판매한 에어컨만 3만대가 넘는다. 하이얼의 시장 점유율이 기존의 삼성전자와 LG전자를 위협할 수준은 아니지만 하이얼이 사후수리를 전담해 줄 수 있는 국내 유통망과 결합할 경우 하이얼의 괴력이 단순히 저가공세에 끝나지 않을 것임을 국내업체들에게 충분히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이런 국내 전자업체들의 위기감을 더욱 부추기는 얘기가 증시에 나돌고 있어 주목된다. 대우일렉트로닉스(구 대우전자) 인수설이 그것이다. 벌써부터 삼성·LG와 더불어 국내 가전시장 3강을 형성하겠다고 선언한 하이얼이 대우일렉트로닉스를 인수한 뒤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여러 관측이 나오고 있다.
지난 11월23일 하이얼은 기자간담회를 갖고 2010년 이전 국내 3대 가전업체 진입을 선언했다. 그리고 노트북 데스크톱 LCD제품 에어컨 냉장고 등의 제품에서 50여개 신 모델을 출시할 계획도 밝혔다.
하이얼의 사업확대 못지않게 관심을 끈 것은 그동안 업계에 나돌던 대우일렉트로닉스(대우일렉) 인수설이었다. 이날 하이얼측은 대우일렉의 인수제안과 관련,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받았다. 하이얼이 대우일렉 인수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업체라는 소문이 퍼져있는 와중에 하이얼측과 대우일렉 매각주간사 관계자의 접촉설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면서 궁금증을 증폭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날 하이얼 관계자는 “이번 간담회는 한국 소비자들에게 하이얼을 알리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며 대우일렉 인수설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했다.
그동안 업계에서 하이얼의 대우일렉 인수설이 초미의 관심사로 자리잡은 것은 향후 미칠 파장 때문이었다. 대우그룹 해체 이후 1999년부터 채권단 관리하에 들어간 대우일렉은 최근 들어 초고속 성장세를 보여왔다. 지난 2000년 1백66억원에 불과하던 영업이익이 2005년 1천2백억원을 바라보게 됐다. 경영실적 호전에 따른 자신감을 바탕으로 채권단은 대우일렉 매각을 늦어도 내년 9월까진 마무리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 중국 칭다오 하이얼공단 전경. | ||
이에 대해 삼성·LG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란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대우일렉 역시 삼성이나 LG에 비해 저가의 제품 생산·판매에 주력해왔으며 프리미엄급 제품이 시장을 주도하는 환경에서 하이얼-대우일렉 조합이 삼성·LG를 위협할 변수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냉장고 에어컨 LCD 시장에서 저가공세를 단행한 하이얼의 성장세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는 평가도 나온다. 현재 국내 중저가 가전제품은 대개 중국에서 현지생산해 들여와 팔고 있는데 이런 전략이 무용지물이 될 뿐더러 하이얼+대우일렉 연합군이 거꾸로 중국 본토에서 국내 가전사들을 무장해제시키는 이중 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이미 하이얼은 LCD TV 같은 비교적 첨단 기종에서도 지난 11월부터 가격 인하 공세에 나서고 있다. 이에 자극받은 삼성·LG가 12월 들어 동시 가격인하를 단행해 맞불을 놓긴 했지만 하이얼이 임금경쟁력을 무기로 저가공세를 펼 경우 삼성과 LG의 캐시카우(현금창출원)가 쪼그라든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삼성·LG가 하이얼의 공세를 결코 ‘방관’할 수만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내 일각에선 쌍용차를 인수한 상하이자동차 사례에서 하이얼-대우일렉 합병에 따른 여파를 유추해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중국기업인 상하이차의 쌍용차 인수 당시 업계엔 ‘상하이자동차는 자동차 문짝도 제대로 못 만드는 회사’라는 루머가 나돌았다. 이 때문에 상하이차의 쌍용차 인수가 국내 정치권 로비를 통해 가능했다는 ‘미확인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인수 이후가 더 문제였다. 자동차 도면 유출 논란과 더불어 국내 시설을 ‘기술개발’과는 거리가 먼 단순 ‘생산라인’화 하려는 것에 쌍용차 노조가 집단적으로 반발했던 것이다. 대우그룹 해체 이후 외형은 축소됐지만 대우일렉은 아직도 가전업계에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저가공세에서 벗어나 국내 가전업계 3강 진입을 노리는 하이얼에게 대우일렉은 상하이차의 쌍용차 인수 이상의 플러스 알파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하이얼이 대우일렉의 전체 인력에 대한 고용승계보다는 일부 생산라인과 유통망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상하이차와 비슷한 맥락에서 하이얼 역시 ‘국내 하청기지 마련’에 무게를 두고 대우일렉 인수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평이다.
이처럼 무성한 소문과 관측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정작 당사자인 대우일렉측은 매각과 관련한 모든 이야기들에 대해 “모두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특히 하이얼의 인수설과 관련해 대우일렉 관계자는 “아직 하이얼에 인수제안서를 보낸 적도 없다”고 못박았다.
이 관계자는 “대우일렉이 워낙 덩치가 크다보니 아무나 인수할 수 없는 업체라서 그나마 국내시장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하이얼이 거론된 것 같다”고 밝혔다. ‘대우일렉 인수가격이 7천억~1조원으로 책정됐다’는 업계 소문에 관해서도 “아직 실사중이며 세간의 추측일 뿐”며 일축했다.
그러나 다수의 업계 관계자들은 ‘아니땐 굴뚝에 연기 나겠는가’란 시각으로 그동안 무성한 소문을 빚어낸 하이얼-대우일렉 관계를 주시하고 있다. 대우전자 시절 대우일렉은 프랑스의 자존심이라고 불리던 톰슨사를 인수하려다 프랑스 현지여론에 밀려 실패했다. 대우일렉의 경영권 향방이 주목받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