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왼쪽), 정의선 기아차 사장 | ||
지난 2005년 재계에 벌어진 굵직한 사건들을 열거해보니 ‘다사다난’이란 말이 절로 나올 법하다.
2006년 새해의 재계 앞날엔 어떤 종류의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무조건적으로 예단할 수는 없는 일. 그러나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전망할 수 있는 재계 공통화두가 얼른 떠오른다. 어느 해보다 재벌가 3세 경영인들의 약진이 두드러질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삼성의 고 이병철 창업주와 이건희 현 회장의 대를 이을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장남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뒤를 잇는 정의선 기아차 사장의 후계 행보는 단연 재계 최고의 관심사다. 그밖에 다른 재벌가에서도 3세들의 경영승계 행보가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2006년 재계는 3세 경영인 도약의 해가 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그러나 그들 앞날이 탄탄대로만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미국 체류중인 이건희 회장의 건강악화설이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이재용 상무의 후계승계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이 상무의 대관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장밋빛 전망이 있는가 하면 경영권 승계과정이 여의치 않을 것이란 비관론도 있다.
삼성측은 이 상무가 등기이사로 재직중인 S-LCD 경영실적 등을 근거로 이 상무의 전무 승진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상무의 후계구도에 큰 장애물이 됐던 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산법) 위반 부분에 대해선 정치권과의 조율이 어느 정도 이뤄지는 분위기다. 재벌의 계열 금융기관이 단독으로 20% 이상 혹은 공동으로 5% 이상 다른 계열사 주식을 소유·지배하는 경우 금감위 사전승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금산법의 골자다. 삼성은 일부 계열사의 삼성에버랜드 주식 인수과정에서 금산법을 위반했다는 논란에 직면했지만 현재 정부·여당 사이에 소급적용을 배제하는 금산법 개정안이 논의되면서 ‘정부의 삼성 봐주기’논란을 낳기도 했다. 정치권과 적정선에서 타협안(?)이 만들어질 경우 이재용 상무의 경영승계에 필요한 지분확보에 가장 큰 걸림돌이 돼온 금산법 논란의 화살이 이건희-이재용 승계과정을 비켜갈 수도 있을 전망이다.
삼성채권 8백억원 사건에 대해 시민단체 등이 특별히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점 역시 삼성에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하는 대목이다. 지난 12월 검찰은 지난 대선과정에서 정치권에 살포된 ‘삼성채권’ 수사와 관련, 정치인들과 삼성측 인사들에 대해 공소시효 만료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아무도 처벌하지 않은 채 사실상 수사를 마무리한 것이다.
삼성가 막내딸 이윤형씨 사망소식 이후 애도의 물결이 인터넷 공간을 뒤덮은 바 있다. 이 점 역시 이 상무의 편법증여 논란을 중심으로 한 ‘반 삼성’ 정서를 어느 정도 희석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이다.
그러나 이 상무의 후계구도에 켜졌던 빨간불이 사라졌다고 단언하기엔 이르다. 삼성 안팎에서 이 상무의 대권승계 구도를 가로막는 여러 변수들이 남아있다.
삼성의 계열사간 순환지배구조를 향한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칼날이 아직도 날카롭다. 이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일부 정치인들은 삼성그룹 해체를 공공연하게 거론할 정도다. 이 사안이 본격화될 경우 후계문제는 당분간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e삼성 문제 역시 이 상무 앞날을 괴롭히는 부분이다. 과거 이 상무가 주도했던 인터넷사업(e삼성) 실패에 대한 손실이 삼성 계열사에 전가된 점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 11월 전국의 경제학자 1백인이 모여 현 정부의 재벌개혁과 금융정책을 비판한 자리에서 e삼성 문제에 대한 정부의 엄정 대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e삼성 문제는 정계와 학계의 성토와 당국의 조사 여부는 물론 이 상무의 부진한 경영실적표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이 상무 앞날에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요인이다. e삼성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보고가 얼마전 삼성 구조본에서 미국 체류중인 이건희 회장에게 올라갔다는 소문이 재계에 나돈 바 있다.
황우석 교수 사태로 그동안 잠잠했던 반 삼성 기류에 대해 민주노동당이나 참여연대 등 진보진영에서 다시 불을 지필 것으로 관측된다. 이들 진보세력은 사실상 수사종결된 안기부 도청 사건에 대한 특검법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검찰측이 확보한 2백74개 안기부 도청 테이프 전량 공개에 관한 문제도 여전히 삼성에게 골칫거리다. 일부 언론은 테이프 공개가 곧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다가올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 문제는 정치적 역학관계와 맞물려 삼성을 두고두고 괴롭힐 전망이다. 반 삼성 여론을 희석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이 상무의 경영권 승계가 무난하게 이뤄질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재계 일각에선 이 상무 승진문제에 대한 찬반양론이 삼성 내부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이건희 회장과 경영승계 논란 주역인 이재용 상무가 당분간 2선에 머물고 대신 윤종용 부회장과 이학수 부회장이 전면에 나서 삼성의 과도체제를 이끌어야 한다는 논리다. 삼성은 현재 대외적인 면에서는 윤 부회장이, 대내적인 면에선 이 부회장이 그룹을 이끌다시피 하고 있다. 당초 퇴진설이 나돌던 구조본 핵심인사 A씨와 B씨도 당분간 그룹 내 안정기류를 위해 자리보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전언이다. 삼성그룹 안팎의 이런저런 사정에 휩쓸려 이 상무 승계과정이 그다지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반면 이 상무의 여동생인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나 남편 임우재 삼성전기 상무보,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와 그 남편 김재열 제일모직 상무는 비교적 경영권 편법상속 논란에서 자유로운 입장탓인지 2006년에는 더욱 전진배치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재계2위 현대차그룹은 2005년 한 해 동안 대규모 인사홍역을 치렀다. 지난해 9월 현대차는 박정인 현대모비스 회장의 퇴진을 시작으로 수시인사를 통해 정몽구 회장(MK) 주변에 있던 MK사단 1세대 회장단을 모두 갈아치웠다. 현대차그룹에 정 회장 말고 다른 회장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60대 회장단을 모두 물러나게 한 정몽구 회장의 2005년 인사태풍은 지난 3월 기아차 사장으로 승진한 정의선 사장의 후계구도와 우선적으로 맞물려 해석된다. 정 사장의 승계구도에 부담이 될 만한 인사들을 정 회장이 모두 정리해주고 있다는 해석이다.
▲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 회장의 아들 박세창씨. | ||
현대차 고위층이 글로비스를 현대모비스 수준까지 키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가 현대차 안팎에서 흘러나온다. 현대모비스는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상 지주회사격인 법인이다. 이번 상장을 통해 성장동력을 얻은 글로비스나 2월 합병 예정인 현대오토넷+본텍 조합이 현대차 주요 계열사 지분을 매집해가면 이는 정 사장의 그룹 지배력 강화로 연결될 수 있다.
삼성 이재용 상무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정 사장은 지분확보 속도가 더딘 편이다. 고속승진과 더불어 부담스러운 1세대 회장단 물갈이 덕분에 경영상 지배력은 높아졌지만 주요계열사 지분 확보 없이 안전한 대권 승계는 불가능하다. 현재 정 사장은 기아차 지분 확보가 2%선에 머물러 있으며 주가 10만원선에 육박한 현대차 주식이나 3만원선에 근접한 기아차 주식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대량 매집은 여의치 않아 보인다. 이런 탓에 글로비스 등을 통한 주요 계열사 지분 확보가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비판적 시각은 정 사장 후계구도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글로비스 상장과 이를 통한 정 사장의 7천억원대 평가차익 취득에 대한 정치권의 시선은 차갑다. 글로비스가 개인 대주주의 출자로 세워진 회사이며 계열사들의 전폭적 물량 지원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정 사장의 막대한 차익 획득을 신종 변칙증여로 보는 비판론이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1세대 임원들이 대거 물러난 점이나 글로비스 등에 대한 지배력 확대과정을 두고 새해엔 정 사장이 부회장직에 오를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이재용씨의 증여과정에 대한 논란이 정의선 사장으로 옮겨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는 정 사장의 부회장 승진을 당초 예상보다 지연시킬 변수가 될 수 있다.
또 정 사장의 부회장 승진은 정몽구 회장의 동생인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의 회장직 이양과도 관련이 있다. 정몽근 회장의 아들인 정지선 현대백화점 부회장은 4촌 중 가장 빠른 승진속도를 보이고 있다. 만약 정지선 부회장이 회장으로 ‘조기 승진’한다면 현대차의 정의선 사장의 승진도 그만큼 앞당겨질 가능성이 크다.
정 사장만큼이나 주식매집으로 주목받은 재벌가 3세로 효성그룹의 3세 경영인들을 꼽을 수 있다. 고 조홍제 창업주와 현 조석래 회장의 뒤를 이을 3세 경영인 조현준 부사장과 조현문 전무 그리고 조현상 상무가 국내 유일의 나일론 원료 카프로락탐 제조업체인 카프로의 주식을 산 지 불과 1년 만에 1백억원가량의 평가차익을 낸 것이다. 카프로 지분 매도를 통한 효성 3세들의 (주)효성 지분 대량 매입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효성측은 이를 극구 부인한 바 있다. 효성은 3세 경영인 3형제가 모두 그룹 내에서 경영자로서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 타 기업의 부러움을 사고 있으며 3형제의 경영권 접수 속도에 가속이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아름다운 형제경영을 표방해온 금호아시아나그룹도 2005년 들어 3세의 경영참여 시작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조짐을 보였다. 고 박인천 창업주의 셋째 아들인 박삼구 현 회장의 장남 세창씨가 금호타이어에 부장직으로 입사해 근무를 시작한 것이다.
금호아시아나는 박성용(1남)-박정구(2남)-박삼구(3남)-박찬구(4남) 형제들이 모두 균등하게 지분을 나눠 갖고 사후엔 장남들에게 지분을 증여하는 방식으로 형제경영을 해왔다. 그러나 박성용 명예회장 타계 직후 장남 재영씨의 훗날 경영참여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평이 나왔던 바 있다. 재영씨가 경영과 무관한 공부를 하면서 미국 체류중인 탓이다.
고 박정구 회장 장남 철완씨도 경영 관련 공부를 하고 있지만 3남 박삼구 회장의 아들 세창씨가 먼저 경영일선에 참여하면서 세창씨에게 무게가 쏠릴지 모른다는 관전평도 나온 바 있다. 일각에선 현재 부장직급인 세창씨의 조기 승진 가능성도 거론된다. 물론 금호아시아나측은 이 같은 항간의 추측에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2005년 한해 동안 주요 대기업 3세 경영인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2006년 새해 들어 경영승계과정에 가속이 붙을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재계 3위인 LG에선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2004년 말 구본무 회장은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 광모씨를 입양해 장자승계구도 기반을 닦았지만 광모씨가 유학중인 관계로 경영참여 시점이 언제가 될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구본무 회장이 구인회 창업주-구자경 명예회장에 이은 3세 경영인이며 4대째 장자승계구도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다른 재벌가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미 후계 구도를 확립한 롯데그룹에선 신동빈 부회장의 대외활동 폭이 얼마나 더 커질 것이냐가 관심의 대상이다. 신 부회장은 이미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도 롯데를 대표해 참석할 정도다. 때문에 롯데의 경우 신격호 회장의 현역활동 여부에 대한 관심이 더 클 정도다.
SK의 경우 최신원-최태원 등 두 4촌 회장에 이어 그들의 동생인 최창원 SK케미칼 부사장과 최재원 SKE&S 부회장의 승진 여부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실상 이들 사촌 4인방은 SK의 오너그룹을 대표한다는 점, 또 사촌간인 태원-재원 그룹과 신원-창원 그룹의 소분리 여부도 2006년 재계 관심사 중의 하나다.
재계 3세 중 현재 과·부장급 주니어그룹에선 큰 변화가 없을 전망이다.
한진그룹의 조현아 팀장이 지난 연말 상무로 승진한 정도이고, 대한전선의 상속자인 설윤석 과장이나 현대그룹 정몽헌 전 회장의 장녀 정지이 과장, GS그룹 허창수 회장의 장남 허윤홍 대리 등은 내년 한해에도 밖에서도 보이는 중책보다는 실무 경영수업에 매진할 것으로 보인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