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1950년대는 보수주의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었고 권력자들은 검열과 도덕의 족쇄로 할리우드를 얽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한 명의 여배우가 룰을 깬다.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인 배우 잉그리드 버그먼. 그녀는 스튜디오 시스템과 가족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사랑을 찾아 대서양을 건넌, 자유연애 사상의 잔다르크였다.
세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고 토니상과 에미상을 수상하며 브로드웨이와 브라운관마저 석권했던, <카사블랑카>(1942)로 영원히 기억될 세기의 연인이었던 잉그리드 버그먼. 하지만 에드윈 존슨 같은 상원의원은 그녀를 ‘타락의 사도’라고 불렀으며, 할리우드는 한동안 버그먼을 추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랑 때문이었다.
1915년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그녀는 3세 때 어머니가, 14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외롭고 힘겹게 성장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 손을 잡고 보았던 연극은 그녀의 인생을 지배했고, 18세 때 스웨덴 왕립극단 단원이 됐다. 그녀에겐 일종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었다. 나이 많은 남자에게 끌리곤 했던 그녀는 극단에서 40대 유부남 배우와 사랑에 빠졌지만 곧 단념하고, 22세에 아홉 살 연상이었던 치과의사 페테르 아론 린드스트룀과 결혼한다.
할리우드 진출은 우연히 이뤄졌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제작자였던 데이비드 셀즈닉은 버그먼이 출연했던 스웨덴 영화 <인터메초>(1935)를 리메이크하면서 그녀도 캐스팅했다. 미국에서의 본격적인 시작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1941). 그녀는 아버지뻘(스물여섯 살 연상)이었던 빅터 플레밍 감독에게 연정을 품었다.
이때부터 버그먼의 ‘할리우드 남성 편력’은 시작되는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 땐 게리 쿠퍼와 사랑에 빠졌고,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작인 <가스등>(1944) 때는 조셉 코튼, <스펠바운드>(1945) 때는 그레고리 펙, <성 메리 성당의 종>(1945) 때는 빙 크로스비, <아나스타샤>(1956) 때는 율 브리너, <굿바이 어게인>(1961) 때는 이브 몽탕, <방문>(1964) 때는 앤서니 퀸, 그리고 <옐로우 롤스 로이스>(1964) 때는 오마 샤리프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이외에도 말런 브랜도와 소설가 존 스타인벡 그리고 존 F 케네디까지, 버그먼은 꽤 많은 남성들과 ‘애정적 친분’을 쌓았고 사진작가인 로버트 카파와의 관계는 꽤 심각했다.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그녀는 뭔가 새로운 삶을 원했다. 할리우드로부터, 남편과 가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셀즈닉과의 계약도 이미 끝난 1948년 그녀는 극장에서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이 만든 <무방비 도시>(1945)와 <전화의 저편>(1946)을 보고, 그 거칠면서도 강렬한 힘에 전율했다.
▲ 잉그리그 버그먼과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
버그먼은 대서양을 건넜고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그들의 모습이 파파라치의 카메라에 걸렸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버그먼은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용서를 구하고 싶어요. 하지만 터무니없는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에요”로 시작되는 편지의 골자는 “이젠 로셀리니와 살겠다”였다. 그리고 1949년 6월 버그먼은 임신한 걸 알게 되었다.
결혼해 아이까지 있는 유부녀 톱스타가 바람을 피워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당시 상영 중이던 <잔다르크>(1948)는 불매 운동에 직면했다. 의회에선 버그먼과 로셀리니에 관련된 영화의 상영 금지가 거론됐고, 수많은 교회는 신의 뜻을 어긴 그녀를 비난했다.
하지만 질풍노도 스타일에 바람둥이였던 로셀리니와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0년 5월에 결혼한 버그먼과 로셀리니는 결국 7년 6개월 만에 이혼했다. 그리고 다음해(1958년) 스웨덴의 연극 프로듀서인 라스 슈미트와 재혼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1948년에 <무방비 도시>를 본 것과 이후에 이어진 일들이다. 후회는 없다.” 이후 그녀는 할리우드로 조용히 귀환했고 <아나스타샤>(1956)로 두 번째 오스카를 수상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감히(!) 시상식장에 나타나진 못했다. 그리고 1959년 거의 10년 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스카 시상자로 등장한 것. 사람들은 기립박수로 환영했다. 이후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1975)으로 세 번째 오스카(여우조연상)를 수상한 그녀는 198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