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회장. | ||
지난해 9월 출국 이후 줄곧 외유중인 이 회장의 귀국이 조기에 이뤄질 것인지,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가 될 것인지, 아니면 장기 해외체류를 택할 것인지에 따라 삼성그룹을 둘러싼 역학구도에도 큰 변화가 있을 전망이다. 이 회장의 귀국설을 따라다니는 관전포인트를 크게 셋으로 나눠 그 가능성과 추후 영향을 진단해본다.
1. 최대 걸림돌 검찰 칼날 어디까지 갈까
이 회장의 연초 귀국에 대한 관측이 일단 빗나간 상태에서 삼성 주변과 다수 재계 인사들은 이 회장의 설 연휴 직전 귀국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연초 귀국설이 삼성 고위관계자로부터 흘러나왔던 점이 이를 더욱 부채질한다.
지난해 9월 검찰의 안기부 도청 사건 수사가 본격화되자 이 회장은 신병 치료를 이유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 도피성 출국이란 ‘꼬리표’가 따라 붙었다. 이는 이 회장이 귀국하더라도 검찰조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란 공감대 하에서야 귀국할 것이란 추론을 가능케 한다.
이 회장의 연초 귀국설이 불거진 직후인 지난 6일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변칙증여 사건의 담당부서인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측은 “당장 이 회장이 귀국하더라도 출국금지 조치를 취하진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기업 총수인 그가 도주할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 회장이 귀국한 상황에서 검찰이 이 회장 처리방향에 대해 미온적 자세를 취할 경우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 이 회장의 미국행이 결국 국정감사 증인출석을 무산시킨 원인이 돼 비판의 소리가 들끓었던 바 있다. 이 회장이 귀국하게 되면 검찰 수사선상의 핵심관련자임에도 소환조사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한 시민단체 등의 비판적 공세가 벌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지난해 11월 귀국한 홍석현 전 주미대사도 출국금지 조치를 당한 뒤 검찰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홍 전 대사는 사법처리를 면했다. 이런 탓에 이 회장이 귀국해 출국금지 같은 일시적 처분을 받을지는 몰라도 앞선 두산그룹 사태에서 보듯 대기업 총수의 구속사태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이 회장이 곧 귀국해도 설 연휴 직후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리는 IOC총회 참석차 다시 출국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이 회장에 대한 즉각적인 출국금지 조치 가능성마저 낮게 보는 시각도 있다. 일단 설 연휴 전에 귀국해 잠시 여론을 달랬다가 다시 출국해 이탈리아 현지에서 동계올림픽을 마치고 나서 귀국하면 이 회장에 대한 비난여론이 다소 무뎌질 가능성도 삼성측에서 고려했을 법하다.
하지만 황우석 사태로 잠지 ‘유예’됐던 반 삼성 여론이 이 회장 귀국 이후 극대화될 경우를 상정하면 검찰수사와 처벌의 수위를 함부로 예단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오는 6월 지방선거전을 앞둔 정치권이 이 회장 귀국 이후 시민단체 등에서 제기할 이 회장 관련 비판적 입장 표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이 회장에 대한 당국의 수사과정과 향후 처리방향이 정치권의 이슈가 되는 순간 삼성이 우려하는 것 이상으로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는 셈이다.
2. 장기 외유 ‘버티기’ 손익계산서
조기 귀국 이후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진단하는 재계 인사들은 이 회장이 장기 외유를 선택할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둔다. 현재 삼성 구조본을 통솔하고 있는 이학수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에게 수시보고를 하고 지시도 받고 있기 때문에 이 회장의 원거리 경영이 가능하다는 입장에서다.
이 회장의 장기 외유를 전망하는 시각의 바탕엔 올해 6월 개최되는 독일월드컵이 깔려 있다. 지금의 황우석 교수 사태와 다가올 지방선거에 이어 월드컵 열기가 전국을 강타하고 나면 삼성에 대한 비판여론이 한풀 꺾일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한 재계 인사는 “이건희 회장과 삼성이 누구보다 한국의 월드컵 4강 신화 재현을 바랄 것이란 우스갯소리가 나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2월에 개최되는 토리노 IOC총회에 이 회장이 참석할 경우를 상정하면 이 회장의 장기외유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삼성측은 이 회장의 IOC총회 및 동계올림픽 행사 참석 여부에 대해 결정된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다수의 재계인사들은 삼성의 대외 신뢰도를 감안할 때 모든 IOC위원이 참석하는 국제행사에 이 회장 역시 얼굴을 내밀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회장이 1월 중 귀국 없이 2월 토리노 IOC총회에 참석할 경우 국내 언론은 동계올림픽 소식보다는 이건희 회장 동선 파악과 근황 취재에 더 열을 올릴 것이 분명하다.
또 이 회장이 장기해외체류를 선택할 경우 이 회장 건강상태에 관한 논란도 다시 불붙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측은 이 회장의 연초 귀국설이 사실이 아님을 설명하면서 그 이유 중 하나로 이 회장의 건강상태를 들었다. 그러나 IOC총회와 동계올림픽 행사 같은 일정을 소화해 낸다면 이는 정부를 우롱한 꼴이 된다.
이는 지난해 9월 출국이 신병 치료가 아닌 도피성 출국에 가까웠다는 인식 확산에 일조할 가능성이 높다. 이 회장 주치의인 이종철 삼성서울병원장은 지난 6일 <해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2월 말 미국으로 찾아뵈었는데 이 회장의 건강이 그런대로 괜찮은 상태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귀국해야 할 상황에선 ‘건강’ 문제가 불거지고, 이 회장 건강에 따른 삼성의 앞날에 불안감이 확산될 때쯤이면 측근이 나서서 ‘괜찮다’고 다독이는 형국이다.
이 회장은 지난 13일 현재 일본 체류중인 것인으로 확인된 상태다. 삼성 구조본 관계자는 “연말부터 신년사업구상을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다”며 “스케줄이 꽉 차 있어 설 연휴 전 귀국은 불가능한 상태”라고 밝혔다. 장기외유 가능성을 내비친 셈이다.
이 회장이 연초 귀국을 위해 일본을 경유하는 과정에서 소문을 접한 시민단체 인사들이 인천공항에 집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국을 연기해 일본 체류중이란 이야기도 나돌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측은 극구 부인한다.
3. 귀국시기와 후계구도 상관관계
삼성은 연초 정기인사에서 대규모 임원승진 인사를 단행했지만 주요 부회장·사장단은 유임됐다. 지난해 이 회장 출국 이후 삼성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면서 삼성 구조본의 주요 인사들이 정기인사에서 ‘옷 벗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반 삼성 정서’ 확산에 따른 담당자 책임론이 대두된 것으로 에버랜드 편법증여 사건에 대한 유죄 판결로 법무팀 주요인사의 교체 가능성도 거론됐다. 재계인사들 사이에선 삼성 구조본 핵심인사들 중 누가 물러날 것이며 예상 후임자에 대한 실명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삼성이 내민 답안지는 ‘현상 유지’이고 구조본이건 누구에게건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는 지난해 수차에 걸친 파문에서도 ‘삼성이 옳았다’는 얘기고 기존 시스템으로 삼성이 간다는 얘기다. 이 회장 귀국이 더 늦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같은 시각과 더불어 이 회장의 귀국 문제는 삼성의 후계구도와도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지난해 재계 2위 현대자동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은 수시인사를 통해 이른바 ‘MK사단’으로 불려온 1세대 회장단을 모두 갈아치웠다. 이는 정 회장 아들 정의선 기아차 사장의 승진과 맞물려 정 사장의 안정적 경영권 승계를 위한 포석으로 받아들여졌다. 정의선 사장 앞길에 부담이 될 수도 있는 ‘MK세대 주역들’을 정 회장이 직접 해체시켜 안정적 승계 기반을 구축했다는 평이다.
반면 지분 승계를 완료한 삼성은 오히려 체제개편 작업에선 뜸을 오래 들이고 있다. 이재용 상무는 이번 승진에서도 제외됐다.
물론 편법증여와 X파일, 언제든 재발할 것으로 보이는 대선자금 문제 등 미뤄놓기만 한 삼성의 현안이 많아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기에는 적절치 않은 시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차그룹 사례에서 보듯 ‘이건희 사단’에 대한 어느 정도 물갈이 작업이 선행돼야 이 상무의 후계작업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란 지적이다. 아울러 이는 이 회장이 귀국해 경영일선에 복귀해야 가능한 일이다.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올 초 전무 승진이 확실시됐던 이 상무는 이번 승진인사에서 제외됐다. 이 회장이 후계자 교육을 세게 시키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일각에선 ‘황태자 자질론’에 눈을 돌리고 있는 분위기다.
삼성그룹은 인사발표에 이어, 곧바로 삼성전자의 지난 4분기 실적이 사상 최대의 실적이라며 수치를 공개했지만 시장의 관심은 ‘이 회장 등장’에 쏠려 있다. 한 재계 인사는 그의 존재를 ‘보여도 걱정, 안보여도 걱정’이라고 전했다. 안보이면 ‘중병설’이고, 국내에 오지 않고 외국(올림픽 행사)에 나타나면 ‘도피성 해외체류’, ‘정부 우롱’이 된다는 얘기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