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는 금강산관광 7주년인 지난해 11월18일 고 정주영 회장의 묘소에 헌화하는 현 회장. | ||
현정은 회장의 어머니인 김문희 용문학원장(78)이 아프다는 얘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김문희씨는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최대주주(19.4%)다. 때문에 고령의 그가 아프다는 것은 그룹 경영권 방어체계에 비상등이 켜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03년 8월 남편 정몽헌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뜬 뒤 두 달 만에 그룹 회장에 취임해 시숙부인 KCC그룹 정상영 명예회장을 상대로 경영권 분쟁, 현대그룹 내 가신그룹 척결, 북한 당국과 갈등을 빚은 김윤규 전 부회장 인사 처리 문제 등 쉴새없이 달려온 현 회장에게 새해 벽두부터 피할 수 없는, 아니 미뤄왔던 그룹 지배구조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된 것이다.
한때 재계 1위를 호령하던 현대그룹은 외환위기와 과도한 대북사업 투자로 인한 유동성 위기, 총수 자살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겪으면서 현재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상선, 현대증권, 현대택배, 현대아산, 동해해운, 해영선박, 현대유엔아이 등 8개 계열사를 거느린 미니그룹으로 축소됐다. 그 와중에도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현정은 회장이 유지하며 재기를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재무상황이 좋았던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 19.4%가 정 회장의 장모 김문희씨 이름으로 돼있던 게 큰 힘이 됐다. 하지만 이게 빌미가 돼서 정씨의 ‘현대그룹’을 현씨네에 넘겨줄 수 없다는 이른바 ‘시숙부의 난’이 벌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현재 현대그룹의 주요 주주들을 보면 정몽헌 회장의 처가식구 일색이다. 구체적인 지분 현황을 보면 현대엘리베이터는 현정은 회장(3.9%), 현 회장의 모친 김문희(19.4%), 현 회장의 부친 현영원(0.6%), 현 회장의 언니 현일선(0,2%), 일선씨 남편 유승지(0.1%), 현 회장 여동생 현승혜(0.2%), 현 회장 막내 여동생 현지선(0.3%), 지선씨 남편 변찬중(0.2%) 등이다.
문제는 현대그룹이 지주회사격으로 현대상선을 지배하는 현대엘리베이터의 대주주인 김문희씨가 ‘유고’시에 그의 이름으로 돼 있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이 상속될 경우 현대엘리베이터가 또 한번 경영권 싸움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이다. 사전에 별도의 상속장을 남기지 않을 경우 김문희씨의 딸 일선, 정은, 승혜, 지선씨는 2세간 똑같은 분할 상속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 2003년 8월 김윤규 전 부회장과 고 정몽헌 회장 장례 일정을 상의하는 현 회장. | ||
이에 대해 현대측에서는 “알 수 없다, 금시초문이다”라는 답을 하고 있고, 용문학원측에서는 “이사장이 출근을 안하고 있다”고만 밝히고 있다. 그러나 김문희씨 주변에선 그가 최근에 보이지 않고 있다는 증언이 많아 김씨의 건강상태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어쨌든 고령의 김문희씨 지분 처리 문제가 현대그룹과 현 회장이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임은 분명하다. 이 현안은 현 회장의 취임 이후 받아든 세번째 미션이다.
현 회장의 행보를 보면 해마다 롤플레잉 게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취임 첫해와 둘째 해에는 경영권 분쟁, 작년에는 김윤규 전 부회장 문제로 인한 북한당국과의 갈등 등 해마다 미션 하나를 완수하면 더 큰 난이도의 미션이 찾아왔다.
지난해 대북사업 위기 때 현 회장이 ‘원칙대응’을 하자 주위에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았지만 결국 현 회장은 위기를 극복하고 현대의 중심임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올해 주어진 경영지배구조 개선이란 현안은 현 회장의 자질 등 내재적인 ‘전투력’의 문제가 아니라 현금 동원력 등 외부적인 요소의 고려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현 회장의 ‘미션 수행 능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사실 현 회장은 회장 취임 이후 세계경영연구원(IGM)의 최고경영자(CEO) 과정, 이어 최고경영자 고급과정, CEO 협상스쿨,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의 ‘지속 가능 경영을 위한 4T 최고경영자(CEO) 과정’ 등 전투력 증강(최고경영자)을 위한 ‘속성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결혼 뒤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던 현 회장이 회장 취임 이후 대북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여유있는 자세와 원칙론, 가신 정리를 할 때 보여준 단호함 등은 그의 능력을 의심했던 사람들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이미 현대그룹의 구심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 그해 11월 회장 취임 후 첫 공식 기자회견을 하는 현 회장. | ||
현 회장에게 올해 주어진 미션은 지배구조개선뿐만이 아니다. 그룹의 뿌리라 할 수 있는 현대건설 인수라는 또 다른 목표가 있다.
현재 현대건설 인수 희망 기업군에는 범 현대가에선 현대그룹, 현대자동차, 현대산업개발 등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이 중 대놓고 인수 희망 의사를 밝히고 있는 곳은 현대그룹이다. 하지만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는 현대건설 주가가 부담이다.
정몽구 회장의 ‘의중’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각에선 정몽구 회장보다, 현대차그룹 가신들이 그룹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현대건설을 인수하자는 의견을 내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현 회장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고 있다. 내로라 하는 호남갑부의 손녀로 태어나 월반해 경기여중에 진학할 정도로 머리 좋은 학생이었고, 국내 최고 재벌가의 다섯째 며느리가 됐지만 남편이 그룹 회장이 됐고, 그러다 남편의 자살로 전업 주부에서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3년, 그는 주위의 우려보다 훨씬 더 미션 수행을 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지난해 그는 2010년까지 기존 6개 계열사를 통해 매출 20조원을 달성하고 현대그룹을 재계 10위권 반열에 올려놓겠다고 선언했다. 스스로 부여한 그의 미션을 그가 완수할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