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여 년간 전국의 산하를 누비며 사찰과 마을, 산천초목을 화폭에 기록한 한국화가 이호신 씨(66). 자연은 삶의 둥지이자 우주며 울타리라는 그는 지금 지리산 아랫마을에 깃들어 '시골 사람'으로 살고 있다.
화첩이 든 배낭을 메고 지방을 다니며 매일 여행자로 살다 보니 한곳에 정착해서 살고 싶었다 한다. 아내 윤광순 씨(65)도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시골에서 사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 초입에 자리한 경남 산청군의 남사마을로 오게 됐다. 울창한 대숲에 이끌려 정한 삶터에서 가을이면 쪽빛 하늘에 주홍빛 열매가 맺히는 감나무까지 얻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산청에서 살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지만 살아보니 고마움 투성이다. 매일매일 사는 순간이 중요하다는 부부는 자연에 깃든 오늘을 살아간다.
이호신 씨는 30여 년간 구도자의 마음으로 전국의 산하를 누볐다. 사물과의 관계를 직접 확인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동식물을 관찰하고 세밀화로 기록했다. 자연과 마음으로, 손끝으로 소통하면서 그는 꽃 한 송이도 그냥 피는 게 아니라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여러 자연과 어우러져 피어난다는 걸 깨달았다.
작은 것 속에 우주가 있고 크게 보되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자연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자연관이고 예술관이다.
이호신 씨는 배낭을 메고 지리산 화첩 기행을 떠난다. 자연경관을 모니터나 사진만 가지고 추억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자연과 호흡하기 위해서다. 절대 거스르는 법이 없는 물과 각자 생김새에 자족하는 바위를 보며 '자연스러운 것이 아름답다'는 통찰을 얻기도 하고 각자 다른 형태와 색을 갖고 서로 어우러지는 단풍을 보며 조화와 질서를 이해하고 '가장 나다운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배운다.
해돋이를 보러 올라간 천왕봉에서는 파도가 몰려오는 것처럼 물결치는 산과 어둠을 걷어내는 일출의 장엄함을 화첩에 담아낸다. 추운 날씨에 붓끝이 얼어붙는데 그마저도 자연과 호흡하며 현장을 느끼는 일이라며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호신 씨. 이런 마음을 가지고 돌아온 그는 화실에서 작은 화첩에 담아온 감동을 큰 화폭에 옮기면서 뭉클하게 남아있는 그때의 감정을 되새김한다.
새들도 집으로 돌아가고 사람들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해 질 녘. 이호신 씨와 그의 아내 윤광순 씨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사계절에도 해 질 녘과 같은 때가 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무의 골격을 드러내는 겨울이 바로 그 계절. 이호신 씨는 낙엽이 처음부터 낙엽으로 온 것이 아니라 무수한 과정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봄에 순이 나고 잎이 자라서 여름에 푸르른 잎맥을 보여주다가, 가을이 되면 오색찬란한 빛으로 물들고 겨울엔 떨어져 발치를 덮어 스스로 추위로부터 보호하며 다시 봄을 기약하는 과정이 자연의 순환이자 순리라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나 사람의 삶이나 비슷하다고 보는 그에게는 자연이 사람이고 사람이 자연이다. 순환의 과정에 있는 이호신 씨는 오늘도 현재에 충실하며 새로운 날을 산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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