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세계를 국내 최대 유통재벌 반열에 올려놓은 이명희 회장의 경영능력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뤄지고 있다. 이명희 회장. | ||
신세계 회장 이명희
학창시절 꿈이 ‘현모양처’였던 이 회장은 결혼 뒤 어느날 아버지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회사에 나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이병철 회장은 그를 국내외 경제인이나 관계 인사와 만나는 자리에 배석시키며 경영수업을 시켰다.
이 회장은 자신이 신세계를 맡은 이유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모든 자식이 다 회사를 물려받지는 않았다. 내가 분석하는 걸 좋아하고 변화무쌍한 것, 새로운 것을 좋아하니까 사업을 맡기신 것 같다. 한때는 6개월간 신문기자 생활도 했다”고 밝혔다.
79년 2월 신세계백화점 이사로 신세계 경영에 합류한 이 회장은 97년 1월 부사장으로 승진할 때까지 ‘신세계 이 상무’로 불렸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의 대부분은 80년대 초반 소공동에 백화점을 짓고 들어온 롯데백화점이 신세계의 아성을 깨고 단숨에 백화점 1위, 유통 1위 자리를 차지한 시기였다.
신세계의 권토중래는 93년 11년 창동에 문을 연 할인점 이마트에서 실마리가 풀렸다. 비슷한 시기에 프라이스클럽과 이마트, 신세계 최초의 강남 점포인 영동점이 문을 열었는데 기대하지도 않았던 이마트에서 대박이 난 것이다. 이때부터 신세계는 할인점 부문의 성장을 발판으로 국내 최대의 할인점 체인으로 거듭났다. 지난해에는 드디어 이마트의 매출액이 롯데백화점 매출액을 추월한 것으로 알려져 신세계와 롯데의 유통 통합 챔피언전이 박빙으로 치닫고 있다.
이를 계기로 이명희 회장의 경영능력에 대한 평가도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이 회장은 전문가 위임형
이 회장은 거주 형태가 특이하다. 일년의 반 정도를 외국에서 머물고 있을 정도다. 주로 겨울에는 따뜻한 미국 남부쪽에서 지내고 일본에서도 따로 거처를 마련해 머물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의 경우 국내에 머문 기간은 4월 중순부터 7월 초, 9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6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 물론 이 기간 신세계 명예회장으로 있는 이 회장의 남편 정재은씨(67)나 아들 정용진 부사장은 한남동 집에 머물고 있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1년에 두 번 정도 유럽과 뉴욕을 다녀온다. 1년 넘도록 해외에 나가지 않으면 패션을 따라가지 못한다”며 장기 해외 출장에 대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가 장기 부재중일 때 회사의 중요 결정은 어떻게 내릴까. 이 회장의 남편 정재은 명예회장은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을 지냈지만 신세계가 삼성에서 분리된 이후 신세계의 경영일선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있다. 신세계의 중심은 이 회장이다.
이와 관련, 이 회장은 부친으로부터 경영수업을 받을 때 처음 받은 가르침이 ‘서류에 사인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는 책임을 회피하라는 게 아니라 전문경영인에게 일을 맡기되 ‘믿지 못할 사람은 아예 쓰지 말라’(疑人勿用, 用人無疑)는 얘기로 이병철 회장의 용인술이라고 한다. 그 스스로도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을 ‘잘한다 잘한다’하면서 치켜세워야 한다. 경영을 맡기더라도 나중에 책임은 엄중하게 묻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 지난해 8월 개장한 신세계 본점 신관. | ||
삼성가 인사들은 재벌가에서도 유독 회고록을 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회고록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이병철 창업주의 3남5녀 중 막내딸인 이명희 회장이다.
지난해 말 나온 이 회장의 큰언니이자 이병철 회장의 맏딸인 이인희 한솔 고문의 회고록에서도 별도의 기고문이 실렸고 책속 사진에서도 가장 자주 등장할 정도로 이 회장과 이 고문이 각별한 사이임을 보여줬다.
이 회장의 사촌오빠인 이동희 전 제일병원 이사장도 그의 자서전 <뿌리깊은 꿈>에서 이 회장에 대해 길게 소개했다.
“명희는 막내라는 것을 누구나 느끼게 해주는 동생이다. 구김살 없고 집안의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는 동생이다. 어린 시절에는 애교덩어리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매사를 깔끔하게 처리해서 누구나 명희를 좋아했다. 우리 집안에 대해서 잘아는 사람들은 명희야말로 선대 회장님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말하곤 한다. 명희는 선대 회장님만큼이나 깔끔하고 명확한 편이다. 결혼을 하고 ‘신세계 이 상무’라고 불리곤 하지만 나에겐 늘 ‘애교덩어리 막내 명희’였다.” 이 전 이사장은 이병철 회장을 기리는 삼성 승지원의 공동 등기자로 올라있을 만큼 이병철 회장 2세들과 각별한 사이였다.
삼성가의 맏아들인 이맹희씨(이재현 CJ회장 부친) 역시 그의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동생 명희씨에 대해 “(삼성 경영에서 배제된 뒤) 내 생활비를 상당부분 보조를 해주었는데 나는 지금도 명희에게 더할 나위없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명희는 내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었고 늘 따뜻한 마음씨로 오빠인 나를 감싸 주었다.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말을 못하고 있으면 늘 지갑을 열고 가지고 있던 돈 전부를 나에게 쥐어준 것도 명희였고 아버지가 나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하면 마지막까지 내편을 들어서 아버지를 설득하려 한 것도 명희였다. 도망자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나는 경제적으로 명희 덕을 많이 봤다”고 적고 있다.
호랑이 같던 이병철 회장에게 그나마 큰오빠 얘기를 붙일 수 있었던 것은 이명희 회장이 부친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부친 생전에 사무실에서 먹는 과일도 먼저 맛을 보고 부친이 좋아하는 당도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들여보냈다는 일화나 76년 이병철 회장이 위암판정을 받고 수술받았을 때 하염없이 우는 막내딸을 보고 이병철 회장이 오히려 위암 완치사례를 보여주면서 위로해주었다는 일화는 이명희 회장이 얼마나 사랑받는 딸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이맹희씨가 삼성에서 물러나기 전 장충동 집을 놔두고 필동에 따로 집을 얻어 살 때 여자형제들 중에는 유일하게 이 회장이 필동집을 찾았다는 증언도 있다. 두루두루 사랑받는 이명희 회장은 집안 일에서도 발언권이 있는 편이다. 이맹희씨는 이병철 회장의 임종 전 구두로 유언을 남길 때 “인희 누나, 누이동생 명희, 동생 건희, 그리고 내 아들 재현이(현 CJ 회장) 등 다섯 명을 모아두고 그 자리에서 구두로 유언을 하고 건희에게 정식으로 삼성 경영권을 물려주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이명희 회장은 다층적으로 읽히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5월 인터뷰에서 그는 아버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느냐는 질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와의 모든 약속과 사랑이 허공속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정재은의 부인 이명희
이화여고-이화여대를 나온 삼성가의 막내딸 이명희는 67년 그의 나이 24세에 경기고-서울공대를 나온 정재은씨와 결혼했다. 시아버지 정상희씨는 전직 국회의원이자 당시 굴지의 재벌회사이던 삼호방직 사장이었다.
이후 정상희씨는 69년 삼성전자 사장, 70년 삼성물산 사장 등 삼성계열사 사장을 지냈다. 정재은씨도 결혼 뒤 삼성전자에 입사해 83년 삼성전자 사장직에 올라 부자 2대 사장 기록을 세웠다. HP와의 합작 등 초기 삼성전자의 기틀을 닦기도 했던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은 지난 93년부터 96년 1월까지 신세계 회장을 지낸 것을 끝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 흉상은 선친 이병철 회장 모습. | ||
이 회장은 정 명예회장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뒀다.
큰아들 정용진 신세계 경영지원실담당 부사장은 지난 95년 탤런트 고현정씨와 결혼해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은 뒤 2003년 11월 이혼했다.
이 회장의 딸 유경씨(34) 역시 계열사인 조선호텔 상무로 재직중이다. 유경씨는 지난 2001년 2월 초등학교 동창인 문성욱씨와 결혼해 딸만 둘을 두고 있다.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문성욱씨는 SK텔레콤을 거쳐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에서 근무하다 결혼 뒤 미국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일본 후지쓰에서 연수를 받고 지난 연말 인사에서 신세계 계열사인 신세계I&C의 상무로 영입됐다. 문 상무도 2세 경영인 대열에 동참한 것이다.
이명희가 말하는 이명희
이 회장은 자신의 스타일에 “아버지처럼 메모하기를 좋아하고 편식 습관까지 아버지를 닮았다. 아버지는 스트레스를 즐겼지만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도망가는 편”이라고 말했다. 또 언니인 이인희 고문의 회고록에 기고한 글을 통해 “나는 머리로 인식해 골프를 치는 스타일”이라고 밝혔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오빠인 이건희 회장이 자신을 장미에 비유했다고 소개한 점이다. 그는 이 회장이 자신을 ‘평범하지 않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이 유별나게 눈에 띄는 스타일’이라고 했다며 그래서 나중에 비문에 “유난하게 살았던 자-이명희 여기 잠들다‘라고 새기자는 우스갯소리를 소개했다.
그는 자신이 “비교적 나이보다 젊고 활기차게 보인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런 말을 듣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삶에 대한 만족감과 적극적인 자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현재의 나에 대해, 내 삶에 대해, 내 주변에 대해 만족하며 산다. 동시에 새로운 것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런 새로운 감각에 대한 ‘감동’은 이 회장의 장기 해외 출장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는 “미국에 가면 건축에 빠지고 미술감각도 달라진다. 좋은 것을 발견하면 반드시 사진을 찍는다. 그 물건이 몇 달 뒤엔 제품으로 개발돼 내 앞에 있어야 한다. 추구하지 않고 감동받지 않는 삶은 재미가 없다”(2005년 5월 <조선일보> 인터뷰)고 말했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